조선시대에는 시집을 가면 장님 3년, 귀머거리 3년, 벙어리 3년으로 지내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았었다. 물론 요즘 시대엔 어림없는 이야기다. 나만 해도 결혼식 전날 친정어머니가 언제든지 힘든 일 있으면 바로 달려오라고 하셨다. 참. 지. 말. 고! 그러나 주변 친구들의 시댁에 대한 경험담과 각종 매스컴에서 떠들어대는 시집살이 에피소드들로, 불안에 떨면서 시월드로 입성했다.
결혼 후의 생활 터전을 시댁 근처 서울로 잡을 것인지 친정 근처 대전으로 할 것인지에 대해 한참을 고민했다. 그리고 지인들의 만장일치로 대전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했다. 그렇게 시댁과는 멀리 떨어져 지냈지만, 또 다른 의미에서 시댁과 더 가까워졌다. 멀다는 이유로 한 번 시댁에 가면 기본 3~4일, 길면 일주일 이상 자고 오게 된 것이다. 명절뿐만 아니라 주말, 방학 때마다 오래 체류하다 보니 나름의 시집살이를 경험하게 되었다.
사실 시댁이 낯선 곳은 아니었다. 결혼 전에 몇 번 자고 온 적이 있었다. 서울에서 임용고시를 치를 때, 남자친구 부모님 댁에서 며칠간 머무르며 시험을 준비했다. 최상의 컨디션과 현지 적응을 위한 결정이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인근 모텔방을 잡았어야 했다. 집에 남는 방이 없어서 남자친구 어머니와 함께 불편하게 잠을 자야 했다. 너무나 친절하신 어머니의 환대에 기뻤지만, 시험을 앞둔 예민함으로 속상했던 일도 있었다. 시험 날 아침. 화장도 안 한 부스스한 얼굴이 민망해 화장실로 돌진하는데 때마침 화장실에서 나오시는 아버지를 그대로 프리패스해버렸다. 그러자 내가 화장실에서 나오기만을 기다렸다가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우리 집에선 아침에 어른을 보면 꼭 인사를 드린단다."
어찌나 얼굴이 화끈거렸던지. 그걸 꼭 시험 보기 직전에 말씀하셨어야 했던 것이었는지 구시렁거리며 시험장으로 향했다. 불합격 흑역사 중의 굴욕적인 한 장면이다.
시집가자마자는 나도 시댁에 잘 보이려고 몇 번 노력한 적이 있었다. 첫 명절 때 더덕을 사 갔다. 도라지와 더덕을 구분도 못 하던 때였다. 초저녁에 시작한 더덕 껍질 벗기기는 새벽이 다되어서야 끝이 났다. 다음날 더덕구이를 하다가 양념이 눌어붙어 프라이팬을 홀라당 태워 먹었다. 노력에 비해 먹을 수 있는 게 몇 점 되지 않았던 더덕은 다른 반찬들에 밀려 조용히 한쪽으로 치워졌다. 시어머니가 의문의 노트 한 권을 수줍게 가지고 나오셨다.
"간단하게 해 먹으려 쉬운 것들로만 준비해 봤어."
빽빽하게 계획되어 있는 3일 내내 해먹을 삼시세끼 메뉴들은 내 눈앞에서 건널 수 없는 깊은 강물처럼 험난하게 굽이치고 있었다. 분명히 방금 아침을 먹었는데 설거지를 다 하고 나니 다시 점심을 준비해야 했다. 식구는 고작 아버지, 어머니, 나, 신랑 이렇게 4 식구뿐인데 설거지 양은 왜 그리 엄청나던지! 더덕 까느라 날 샜는데, 또 계속 일하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남편이 어머니에게 말했다.
"명절에 한 끼 안 먹으면 죽나? 그냥 대충 해, 대충~"
"그래도 제때 밥은 먹어야지. 복잡한 거는 하나도 없어.”
명절이 아니어도 밥 세 끼는 꼭 먹으니 어머니 말씀에도 일리가 있었다. 그 명절 이후로 난 간헐적 단식을 시작했다. 이제 하루에 두 끼만 먹는 사람이 되었다.
명절에 차례나 제사는 지내지 않지만, 음식을 준비할 생각에 시댁에 가기 싫은 마음이 점점 커져만 갔다. 분명 좋은 분들이고 편하게 해 주시는데 어쨌거나 음식 만들 때 같이 거들고, 치우는 것 자체가 귀찮고 힘들었다. 그렇다고 남편이 나 대신 일하고 난 안 하자니 마음이 불편해지는……. 반면 친정은 언제 가도 손 하나 까딱 안 하고 누워 있을 수 있는 곳이니 시댁과 친정은 하늘과 땅만큼의 온도 차가 생겨버렸다.
그렇게 몇 번의 명절을 거치고 드디어 첫 손주가 태어나자, 상황은 조금 나아졌다. 아이를 돌본다는 명목이 생겨 앉아서 해주는 음식을 받아먹을 수 있게 된 것이었다. 물론 아이를 낳자마자 생긴 사돈댁의 우환을 불쌍히 여기시어 많은 배려를 받은 것도 있었다. 그때부터 난 시댁에서 손 하나 까딱 안 하는 며느리가 되었다. 어머니는 늘 우리가 오기 전에 며칠 치의 끼니를 다 계산해서 음식을 미리 해놓으신다. 그리고 식사 때 준비해 둔 음식을 데우며 말씀하셨다.
"나중에 나 나이 들어 힘이 없어지면 네가 다 해야 한다."
시댁에 가면 여전히 설거짓거리가 쌓인다. 많지도 않은 식구들이 죄다 따로 각자의 시간에 먹느라 여러 번 차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대부분의 식사가 우리 아이들, 손주들에게 집중되어 있다. 또 정갈한 음식의 맛에서 어머니의 사랑이 느껴진다. 하나라도 더 먹이고 싶어 하는 할머니의 마음이 가슴 찡하게 전해진다.
오랜만에 시댁에 갔다. 그동안 필요한 볼일을 쌓아두고 아들 오기만을 기다리신 어머니와 남편이 외출하고, 나는 한가한 오후를 만끽하고 있었다. 아이들과 잠깐 방에서 영화 보고 나오는데 시아버지가 설거지를 거의 끝내 놓으셨다.
"아, 아버님~ 제가 할 건데……."
"우리 며느님은 설거지를 쌓아놓고 감상하시기 좋아하셔서요~ 제가 그냥 했지요."
시아버지의 뼈 때리는 농담에 정곡을 찔렸지만, 그냥 웃어넘긴다. 얼마 전에는 어머니에게 남편 흉을 봤다. 남편이 다 좋은데 잔소리가 너무 심하다면서 실컷 이야기했더니 묵묵히 듣고 계시던 어머님가 말씀하셨다.
"네가 좀 게으른 편이긴 하지."
여전히 시댁은 어렵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귀에 들리는 상황 하나하나를 들고 따지기보단 그 안에 온전히 담긴 마음에 집중해야 한다. 단편적인 사실들이 아닌 그 이면의 진실에 도달했을 때 고부간의 갈등은 어느 정도 해소되지 않을까.
시어머니의 다이어트를 위한 한 달 합숙 기적의 식단 프로젝트, 3대가 떠나는 일주일 강원도 횡성 여행, 시부모님 모시고 제주도 2주 살기, 호랑이보다 무서운 여름 손님으로 부모님 모셔 와 집에서 여름 나기……. 누가 왜 자꾸 일을 벌이냐고 물으면 그냥 웃는다. 이유는 없다. 그냥은 그냥이다. 나는 나중에 며느리가 생기면 이민을 갈까 생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