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성형수술 이야기
어린 시절 친구들끼리 장난으로 서로의 외모를 가지고 별명을 지어 놀리곤 했다. 그러나 감히 난 메뚜기를 닮은 친구에게 메뚜기라고, 얼굴이 길쭉한 남자애에게 말 대가리라고 할 수 없었다. 친구를 위한 의리감 때문이 아니었다. 내가 못생겨서였다. 초등학교 시절 친구들에게 못생겼다는 말을 듣고 상처를 많이 받았다. 아예 개성 있게 생겼더라면 속 편하게 인정하고 나름 다른 방면으로 살길을 찾았을 텐데 애매하게 못생긴 탓에 속으로만 끙끙 앓았다.
나의 외모 콤플렉스는 여드름이 나기 시작한 5학년 때부터 시작되었다. 미소년처럼 되고 싶어서 머리카락을 짧게 자르고 학교에 가니 친구들이 아줌마라고 놀렸다. 앞머리로 애써 이마에 난 여드름을 가리려고 할수록 번지는 탓에 동생은 나를 여드름 바이러스라고 놀리기 시작했다. 중학교 때 짧은 단발은 내 턱을 더 사각형으로 보이게 했고 두꺼운 빨간 뿔테 안경으로 시선을 분산하여 얼굴을 가리려는 그 당시 나의 의도는 지금 생각해도 터무니없이 느껴진다.
중학교 1학년, 몇 명의 아이들이 얼굴 순위 매긴 적이 있었다. 나는 초라하게 뒤에서 2위를 차지했다. 게다가 학원 선생님이 같이 수업 듣던 친한 친구의 외모를 입이 마르게 칭찬하면서 나에겐 욕심 있게 생겼다는 한마디를 무심히 툭 던졌다. 일부러 괴롭히려고 나쁜 마음으로 말한 게 아니었다. 그저 장난이었다. "눈, 코, 입 다 따로따로 보면 예쁜 데 합치니까 너무 평범하네." 스쳐 지나가는 그 말들은 결국 나를 차가운 수술대에 오르게 했다.
"턱이 아주 상당한데요? 아... 상당합니다. 이건.. 남자 턱 근육인데요?"
지긋지긋했던 내 사각턱과의 이별을 위해 강남 모 성형외과를 찾았다. 그전에 근육을 퇴화시킨다는 보톡스를 몇 번 맞았었는데 효과가 상당했다. 주위에서 얼굴이 갸름해 보인다, 살 빠졌다는 소리를 들었다. 한번 보톡스를 맞기 시작하면 결국은 턱 수술까지 간다더니 정말이었다. 큰 결심을 하고 서울 유명 성형외과를 돌기 시작했다.
사각턱이 주는 강한 이미지를 어머니는 믿음직스러워 보인다며 좋아하셨다. 그러나 나는 가녀린 여성스러움을 원했다. 푸근해 보이는 이미지는 그 당시 젊은 나에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나이 드신 분들에게만 인기 있는 선거 출마용 얼굴일 뿐이었다. 당시 귀밑에서부터 턱 끝까지 뾰족하게 v 라인으로 턱을 돌려 깎는 게 유행이었다. 그런데 난 그렇게 뾰족하게 깎으면 광대가 도드라져서 나중엔 광대 수술까지 할 수 있다는 말에 소심하게 살짝만 깎아달라고 했다.
인터넷으로 수술 전, 중, 후, 성공과 실패, 수술 후 부작용까지 모든 다양한 사례를 샅샅이 찾아 공부했다. 수술 후에 퉁퉁 부은 얼굴을 가리고 입고 벗기 좋게 큼지막한 남자 후드티를 샀다. 물론 사전에 부모님 설득과 필요한 자본도 미리 마련해 놓은 상황이었다. 그렇게 서울로 혼자 고속버스를 타고 올라가 수술을 마쳤다.
아득히 먼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몇 번의 잠꼬대 같은 말을 하다가 깨어났다. 간호사가 내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살금살금 링거대를 붙잡고 걸어 다녀야 하고 아프니 약을 꼭 먹으라고 몇 가지 기본적인 안내만 해주고 병원 관계자들은 모두 퇴근했다. 캄캄한 병실에 혼자 남았다. 일인 병실엔 그 흔한 TV조차 없었다. 다음날 날이 밝은 대로 경과를 확인하고 집에 갔다가 일주일 후에 다시 와야 했다. 그 좁은 병실에서 할 수 있는 건 핸드폰 보는 것뿐이었는데 도저히 그 작은 화면을 집중해서 들여다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일부러 시간도 큼지막한 벽시계로만 확인했다. 1분이 참 더디게 흘렀다.
다음날 고속버스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차라리 좀 움직이니 더 나은 것 같기도 했다. 집에 와서도 한참 동안 거울을 보지 못했다. 부기 때문에 누워서 잘 수도 없었다. 쿠션을 받쳐놓고 비스듬히 상체를 세워 목베개를 낀 채 잠을 청해야 했다. 거실 소파에 기대어 앉아 나지막한 신음소리를 내며 멍하게 TV를 보고 있는 나를 보며 지나가시던 아버지가 빙그레 웃으셨다.
"어이구, 잘하는 짓이다."
예뻐지겠다고 얼굴에 못 할 짓을 하고 붕대를 감고 앉아있는 딸이 한심해 보이셨던지 자꾸만 아픈 내 모습을 흉내 내며 놀려대셨다. 시끌시끌 가족들 말소리가 나니 좀 살만해졌다. 새벽 내내 홀로 외로이 '아... 으...' 같은 좀비 소리만 내며 날을 지새우다 거실 TV로 아침 뉴스가 나오고 부엌이 덜그럭거려야 좀 숨이 쉬어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고 병원에 다녀온 후 열심히 공원을 걸었다. 학교에 조금이라도 자연스러운 얼굴로 출근하려면 남은 방학 동안 부지런히 부기를 싹 빼야 했다. 눈치 빠른 반 아이들이 선생님 얼굴의 변화를 알아볼 것이 걱정되었다. 그러나 설마 턱 수술을 상상이나 하겠나 싶기도 했다. 친한 선생님 두 명에겐 이미 이야기를 해 놓은 상태였다. 지금이야 마스크를 쓰고 출근해도 어색하지 않겠지만 그 당시엔 얼굴에 무슨 짓을 했든지 온전히 얼굴을 드러내고 출근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다행히 아이들은 '어? 선생님이 뭔가 달라지신 것 같은데? 화장발인가?' 하면서 넘어갔다. 그런데 교감 선생님은 상당히 집요하셨다.
"뭐 했지? 뭐가 달라졌는데? 뭐 했어? 분명히 뭐 했는데?"
방학 동안 생과 사를 넘나드는 턱 수술하고 온 독하디 독한 신규교사라고 차마 말씀드릴 수가 없었기에 애써 말을 돌렸다. 평소 얼굴에 손대는 것에 관심이 지대하신 교감 선생님의 눈썰미는 피해 갈 수 없었지만 그래도 무사히 고비를 넘기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성형수술을 널리 홍보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수술 후 드라마틱한 변화가 있기는커녕 아래턱의 감각이 이상하고, 울퉁불퉁하게 느껴지며, 얼굴이 약간 비대칭이 되는 등의 부작용을 겪었다. 자연스러움을 역행하는 것은 뭐든지 부작용이 뒤따르는 법이다. 하지만 외모 콤플렉스에서 벗어나고자 뼈를 깎는 고통을 감행한 나 자신을 비난하고 싶지는 않다. 예전에는 성형수술 사실을 무덤까지 가져가고자 했으나 이제는 장난스레 주변인들에게 밝히곤 한다. 딱히 말을 해도 이게 수술을 한 얼굴인지 아닌지 분간도 되지 않는다.
어린 시절의 사진들을 꺼내 하나둘 살펴봤다. 내 인생에서 최고로 예뻤던 얼굴이었다. 다신 오지 않을 그 찬란한 순간들을 왜 그렇게 자신 없이 움츠러들며 보내야 했을까? 자기 외모에 대한 자신감은 결국 건강한 내면으로 나온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외모 가운데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을 가지고 있다. 어떤 날은 그것이 크게 다가오고, 또 어떤 날은 아무렇지 않게 느껴지기도 한다. 외모에 대한 장난은 나에게는 절대 그냥 스쳐 지나가는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에 휘둘리지 않고 외모 콤플렉스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나 스스로를 사랑하고 내면의 아름다움의 가치를 알아야 했다.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이 되지 않았다. 결국은 나만의 아름다움을 찾는 것이 진정한 미인이라고 할 수 있음을 이제는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