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한번 다녀오려면 만만치 않은 돈이 든다. 로버트 링거는 『액션』이란 책에서 ‘배움에 대한 투자는, 후에 그 어떤 것보다 큰 보상을 가져다주는 씨 뿌리기’라고 말한다. ‘짠테크’의 대가인 내가 여행에는 돈을 쓰는 이유이다. 지루한 일상을 벗어나 새로운 영감을 얻고 색다른 경험을 위해 아낌없이 여행에 투자하는 편이다. 사실 내가 하는 일은 여행에 대한 승인이고, 실제로 비용 절감을 위해 여기저기 알아보는 행동 요원은 전적으로 남편 몫이다.
겨울철, 우리 가족의 여행 시즌이다. 한참 성수기 때를 피해 느지막이 비수기를 골라 할인된 가격의 숙박업체를 찾았다. 이때 주변의 놀이 시설과 동선을 고려해야 하며, 보통은 2인 기준의 숙박료로 계산되므로 4인 가족인 우리는 인원 추가에 대한 비용까지 따져야 한다. 아니 그래야 한다고 들었다. 급하게 하루 이틀 남겨두고 갑자기 취소되어 인터넷 거래사이트에 올린 숙소로 구하면 아주 저렴하게 다녀올 수도 있다. 이것저것 꼼꼼하게 따져 물어보고 추가 에누리까지 하면 성공이다. 나는 언제든 미리 세팅해 둔 여행 가방을 꺼내기만 하면 된다.
이번 강원도 여행 일정 중에 글쓰기 모임이 잡혀 있었다. 한 달에 두 번 자신이 쓴 글을 가지고 온라인에서 만나 피드백을 주고받는다. 여행 중에 글쓰기 모임이라니! 너무 낭만적이지 않은가? 워터파크에서 신나게 물놀이를 즐긴 후 저녁쯤에 숙소에 도착해 남편에게 두 아이를 맡기고 (사실은 넷플릭스에 맡기고) 작은 방에서 줌으로 온라인 모임에 접속했다. 책상이 없어서 베개를 겹쳐 쌓아 그 위에 아이패드를 올려 최대한 높이를 맞추고 반가운 얼굴들과 마주했다. 여행 중이라는 사실에 모두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다.
다음 날은 속초 중앙 시장에 들러 장을 봐서 두 번째 숙소인 가평 풀빌라로 이동하는 일정이었다. 아침부터 내리는 눈이 심상치가 않았다. 체크아웃하기 전에 분리수거하러 잠시 나갔다 왔는데도 외투 모자에 눈이 한가득 쌓였다. 마냥 신나 하는 아이들과 그곳에서 더 머물며 눈놀이를 즐기고 싶었지만, 핸드폰으로 폭설경보가 울려댔다. 눈이 더 쌓이기 전에 서둘러 이동하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하염없이 내리는 눈 때문에 속초 시장의 명물인 닭강정과 술빵도 포기하고 남편은 바로 고속도로 쪽으로 차를 돌렸다. 창밖은 정말 겨울왕국 그 자체였다. 온 세상이 하얗게 뒤덮여 환상적이고 몽환적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리조트를 출발하자마자 차가 이상 징후를 보이기 시작했다. 신호 대기를 받고 남편이 브레이크를 잡는데 차가 바로 멈추지 않고 스르르 밀렸다. 워낙 미끄러워서 그런가 보다 하고 들어선 길이 하필이면 앞뒤로 움푹 파인 지형이었다. 심한 경사 정도는 아니었는데 바퀴가 헛돌면서 올라가질 못했다. 후진으로도 마찬가지였다. 오도 가도 못한 상황이 되어 비상깜빡이를 켜둔 채 다른 차들이 먼저 지나가게 한쪽에 서 있었다. 그때 마침 제설차가 눈을 치워주면서 지나갔다. 때는 이때다 싶어 부리나케 남편은 가속페달을 밟았다. 타이어 타는 냄새가 났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다른 몇몇 차들도 이곳에서 우리처럼 헤매긴 했지만 그러다 곧 사라졌다. 우리 차만 고립된 것이었다.
긴급출동 서비스를 요청했다. ‘비상구난’으로 상황을 알리자 출동팀이 견인차를 가져오기로 했다. 한참 후에 도착한 출동팀은 작은 봉고차 같은 걸 끌고 와서는 ‘카니발 7인승’인 우리 차에는 연결고리가 없어서 견인하지 못한다고 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냐는 말에 눈이 녹을 때까지 기다리라는 무책임한 말을 남기며 시도는 했으니 서비스 횟수를 한번 차감하겠단다. 그러고는 정작 본인 차도 이 ‘마의 구간’에서 빠져나가지 못해 한참 실랑이를 벌이다 간신히 떠났다. 어이가 없었지만, 아이들을 생각해서라도 더는 지체할 수 없었다. 그나마 차에 설치된 모니터로 영화를 보여주며 버티는 중이었다. 영화가 끝나가고 있었다.
사실 얼마 전 자동차 점검을 받을 때 앞바퀴 타이어를 교체하라고 해서 남편이 이번 여행만 다녀오면 바로 교체할 계획이었다고 했다. 그런데, 뜻밖에 눈이 와서 이 지경에 이른 것이었다. 그래도 고속도로 진입 전에 멈춰서 큰 사고가 없었으니, 다행이라며 애써 위안했다. 인근 타이어 가게에 전화를 돌렸다. 출장 타이어 교체도 있지만 지금 워낙 눈이 많이 오는 상황이라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했다. 아이들이 있다고 더 빠른 방법이 없냐고 문의하니 아는 레커차 사장님을 소개해 주시며 10만 원에 견인해 주신다고 하셨다.
난생처음 레커차에 탔다. 원래는 뒤에 매달려 가면서 운전하지 않아도 차가 저절로 움직이는 ‘자율주행’을 경험하는 줄 알았는데 우리 차에서 다 내리라고 해서 아쉬웠다. 도착한 정비소에서 앞바퀴뿐만 아니라 뒷바퀴도 싹 다 갈아야 한다고 했다. 별수 없이 80만 원에 바퀴 4개를 모두 갈았다. 사무실에서 기다리는 동안 쓴 돈이 아까워 커피라도 한잔 뽑아 마셔야 했다. 아이들은 이곳에서도 또다시 TV 애니메이션 채널에 빠져들었다. 평소 TV 없는 집에서 키운 아이들답게 비상시에 아이들은 미디어 앞에서 초집중하는 큰 힘을 발휘했다. 커피의 단맛이 쓰게 느껴졌다.
예정보다 다섯 시간이나 지체되어 다음 숙소로 이동했다. 남편은 운전하면서 연신 셀프 반성모드로 혼잣말을 했다. 미리미리 대비를 해야 했다며 거듭 성찰했다. 여행에는 원래 비용이 많이 들지만, 특히 이번 여행에서는 예상치 못했던 돈까지 들었다. 여행 비용 절감을 위해 그렇게 노력했지만 결국 큰돈이 깨지고 말았다.
인생은 한 치 앞을 예상할 수 없다. ‘미래를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어서 인생은 멋진 것’이라고 러시아의 작가 톨스토이는 말했다. 다시 출발하는 차 안에서 근래 들어 가장 많은 눈 구경을 했다.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