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개수업은 내게 맡겨
나는 발표하기를 좋아하는 학생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선생님 말씀이 끝나기가 무섭게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어쩌다 지명되면 구름 위에 두둥실 떠있는 기분이 들곤 했다. 그러나 학년이 높아지면서 주변 친구들에게 괜히 나대 보이는 아이로 찍힐까봐 발표를 주저하게 되었다. 발표할 사람이 없는지 애타게 기다리는 선생님의 애처로운 눈빛을 애써 외면하며 나도 모르게 올라가는 손을 꾹꾹 눌렀다. 그 소녀가 자라 선생님이 되었다. 눈치 안보고 발표할 기회가 많아졌다. 업무 자체가 늘 아이들 앞에서 발표하는 일이니 아주 적성이 찰떡같이 들어맞았다.
잘난 척하는 것처럼 보일까 봐, 다른 아이도 발표하고 싶은데 나만 하는 건 아닌지 걱정할 필요도 없어졌다. 심지어 학년대표수업도 척척 손을 들어 지원하면 주변 선생님들의 찬사와 함께 고맙다는 인사까지 받았다. 매일 스무 명 정도의 나만 바라보는 눈동자를 마주하며 수업하는 기분은 가슴이 벅차다 못해 짜릿하기까지 하다.
이렇게 남들 앞에 서서 주목받기를 좋아하는 성격은 사실 주변 사람들을 깜짝깜짝 놀라게 한다. 일상생활에선 크게 나를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지내는 탓이다. 특히 동종업계에 종사하는 남편은 공개수업을 즐기는 나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다소 특이한 사람으로 치부한다. 본인의 고통을 이해해 주지 못함을 공감 능력이 떨어진다고까지 하며 안타까워한다.
“공개수업? 그거 서로 하고 싶어 하는 거 아닌가? 엄청나게 신나잖아!”
살면서 무대에 오른 경험은 몇 번 없었다. 대학교 때 영어교육학과 학술제에서 작게 준비한 영어연극 무대, 대학생들끼리 준비해서 겨루는 소소한 영어연극대회, 내가 무대에 오른 건 아니고 나 대신 아이들을 무대에 올린 합창경연대회에서 지휘했던 경험, 그리고 인생에서 가장 화려한 주인공이 되었던 결혼식까지……. 손에 꼽히는 이 경험들은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무대 위 화려한 조명 속에서는 관객석이 잘 보이지 않는다. 무대에 오르기 전 떨림은 내가 분명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에 찬 기대감 같은 것이다. 이것은 걱정과 불안보다는 설레어서 떨리는 것으로, 공연이 끝나고 박수갈채와 함께 가슴이 터질 것 같은 충만한 기쁨으로 마무리된다. 남들보다 훤칠한 외모에 가창력과 연기력을 겸비했더라면 연예계에 진출했을 것 같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일찌감치 연예계 쪽으로 타고난 친구와의 재능 차이를 알아차린 탓에 그쪽으론 발도 디밀지 않았다. 하지만 문득문득 연극을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무대 조명의 짜릿함을 알아버린 이유 때문일 것이다.
남들 앞에서 주목받는 것이 유난히 좋았다. 특출 난 재능은 없었다. 그래서 공개수업이 참 좋았다. 짜인 각본, 지도안대로 잘 가르치는 선생님 연기를 하면서 40분 동안 많은 사람의 주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공개수업 날, 너무 잘하려는 마음이 앞서 말이 자꾸 빨라지고 목소리는 삑사리가 난다. 아이들이 조금만 협조하지 않아도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화가 나기 시작한다. 이 모든 것이 욕심 때문이다. 생각대도 흘러가지 않은 수업을 버리고 또 다음 공개수업을 기다린다.
어느 순간부터 수업의 주인공이 교사인 나였다. 아이들보다 주목받길 원하고 잘 가르치는 교사로 각인되고 싶었다. 모든 수업을 나의 독무대로 생각하고 즐기다 보니 언젠가부터 아이들은 뒷전으로 밀려나 있었다. 그러는 중에 차츰차츰 번아웃이 찾아오게 되었다. 주객이 전도되었다고 해야 할까? 아이들을 위한 수업보다 나를 드러내기 위한 수업을 준비하고, 아이들이 힘들다는 것도 내가 좋으면 과감하게 밀어붙였다. 난 분명 열심히 하는 훌륭한 교사인데 정작 아이들은 아무것도 배운 게 없었다. 관계가 삐그덕거리기 시작했다.
2023년. 학교에서 도망치다시피 선택한 병 휴직과 육아 휴직 1년 6개월의 시간을 뒤로하고 다시 아이들과 마주했다. 아침에 아이들이 쓴 모닝 페이지를 매일 읽어주면서 아이들의 마음을 들여다본다. 수업 시작 전 손바닥을 가슴 높이로 올리고 아이들을 배움의 세계로 초대하고, 판단과 평가를 하지 않고 미소와 기다림으로 존중하며, 놀이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만들 것을 소리 내 다짐한다. 학급의 안전한 울타리 안에서 수업이 시작된다. 수업 중 아이들의 질문은 가끔 교과서 내용과 관계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기도 하고, 수업 놀이 방법을 설명하다가 시간이 다 지나가 버리기도 한다. 그래도 시끌벅적한 수업이 즐겁다.
가르쳤던 내용이나 수업방식은 그대로인데 달라진 점이 있었다. 나를 위한 수업이 아닌 아이들을 위한 수업을 한다. 수업 자체보다는 아이들의 마음을 알아주는 데 더 노력하는 중이다. 나를 드러내려고 안간힘을 쓰던 그때와는 다르게 힘을 빼니 조금 더 자연스러워진 기분이다. 욕심을 내려놓으니 한결 마음도 가볍다.
오는 4월 공개수업을 어떤 반이 할지 정하는 회의를 했다. 나도 모르게 번쩍 손을 들어버렸다. 이번엔 확실히 내가 아닌 아이들이 주인공이다. 그러면서 나도 조금은 무대의 기쁨을 누려도 보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