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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MK Dec 01. 2024

국토대장정

  광주에서 임진각까지 약 한 달간의 국토대장정이 시작되었다. 출발 전날 광주 조선대에 집결하여 발대식 및 촛불 의식을 가졌다. 냄새를 미리 빼두지 못해 닭똥 냄새로 머리가 지끈거리는 침낭에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일기를 썼다. 냄새 때문인지 설렘 때문인지 그날은 밤늦도록 눈이 말똥말똥했다.


  소나기가 한차례 세차게 내리더니 곧바로 해가 쨍하고 떠올랐다. 신발이 발에 완전히 밀착되어야 물집이 생기지 않는다기에 양말을 두 개씩 겹쳐 신었다. 검지와 엄지로 신발끈을 붙잡고 양쪽으로 팽팽하게 잡아당겼다. 종일 태양 빛 아래에서 땀범벅으로 거지꼴이 되어도 얼굴만은 타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선크림을 덕지덕지 발랐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빠트린 물건이 있나 배낭을 챙겼다. 출발 전 ‘청춘’ 소대원들과 구호를 크게 외쳤다.



  행군이 드디어 시작되었다. 첫 번째 행군은 25킬로미터 정도를 걸었는데 뒤에 10킬로미터는 물도 없고 그늘도 없었다. 첫날부터 만만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은 비가 억수로 쏟아지고 앞도 잘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어떻게 걸었는지 기억조차 없다. 그날 우비만 걸치고 저녁 식사를 했는데 정말 피난민이 따로 없었다. 최대한 고개를 숙이고 음식물을 입에 욱여넣었다. 빗물도 함께 들이키지 않으려면 빠른 숟가락질이 관건이었다. 이런 경험을 또 언제 해볼 수 있을까 싶어 내친김에 물싸움까지 하면서 속옷도 홀딱 젖었는데 그날 하필 단수가 되어 샤워를 못 한다고 했다. 물티슈 두 장으로 세수와 샤워가 가능함을 그때 처음 알았다.



  매일 7~8월의 무더위와 싸우며 3~40킬로미터씩 걸었다. 첫날 행군은 아주 양호한 편이었단 걸 나중에야 알았다. 숙소를 찾지 못해 야간행군을 해야 하는 날도 있었다. 보통 대학교나 초, 중, 고등학교 건물 체육관 및 빈 교실을 빌려 베이스캠프로 삼았다. 수돗가에서 씻고, 침낭 깔고 자고, 다음 날 아침을 간단히 해 먹고 재정비해서 출발했다. 한 번은 익산 모 고등학교 운동장에서 밥 해 먹는 것과 수도와 화장실 사용을 허락받았는데 건물 내부 사용은 우리가 더럽다는 이유로 안 된다고 했다. 그날따라 저녁 9시 넘어서까지 걸어왔고 비도 엄청나게 쏟아지고 있었다. 학교 체육관을 사수하자고 모두 우비를 입고 운동장으로 모여서 결의했다. 여러 민중가요도 부르고 어깨동무하며 정말 치열하게 고함을 질렀다. 결국 체육관에서 잘 수 있게 허락받고 소대별로 차례를 지켜 들어와 잘 수 있었다. 민주주의를 부르짖는 고결한 투쟁이 아닌 하룻밤만 재워달라는 투정이라고나 할까.


  비가 올 것 같은 날은 우비를 입고 행군을 했는데 차라리 비가 오는 게 나을 정도로 힘들었다. 구름이 잔뜩 껴서 바람은 시원한데 우비를 입고 있으니 그 시원한 바람을 맞을 길이 없었다. 습도가 높고 더워서 이런 날은 특히 낙오하는 사람이 많이 생겼다. 점점 요일 개념이 사라졌다.



  낙오자가 속출하는 가운데 역시 난 군인이 되었으면 좋았겠다란 생각을 하기도 했다. 육사 지원 요건 키 159센티미터에서 1센티미터 모자라 지원도 못해보고, 경찰대는 영어 시험의 장벽이 높아 포기했다. 하지만 언제나 이런 행군을 동경해 왔었다. 국토대장정을 하면 보통 발에 생기는 물집과의 사투가 시작되는데, 난 가끔 나온다는 ‘신의 발’의 주인공이었다. 종일 걸으면서 물집 한번 잡히지 않는 강철 체질이었다. 물론 중간에 생리가 터져 온종일 생리대도 갈지 못하고 걷느라 허벅지가 다 쓸려 고생한 적은 있었다.


  “좌로 밀촤악! 우로 밀촤악!”


  걸으면서 주변의 꽃도 보고 하늘도 보고 심지어 길가에 굴러다니는 예쁜 돌멩이도 찾을 줄 알았는데… 정말 앞사람 발 뒤꿈치만 보고 걸었다. 어쩌다가 구호 소리가 들리면 황급히 우리 소대 깃발을 찾아서 이탈하지 않고 대열을 맞췄다. 사실 온종일 걸으면서 인생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될 줄 알았지만 걷는 내내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냥 힘들고 졸리고 빨리 끝났으면 싶은 생각뿐이었다. 사실 국토대장정 떠나기 전에 썸 타던 남학생이 있었는데 그 아이가 갑자기 출발 당일 날 하차하게 되어 걱정되고, 또 아쉬운 마음이 대장정 하는 내내 떠나지 않았다.


  

  같은 ‘청춘’ 소대원들에게는 내가 늘 큰소리로 떠들면서 이것저것 짐을 잔뜩 짊어지고 다닌다고 ‘잡상’, ‘라디오’, ‘잡동사니’, ‘좌판’으로 불렸다. 노다지 노래 부르고 웃고 떠들면서 주위 사람들의 기운을 북돋아 주었다. 하지만 대장정 중반 이후부터는 체력이 달렸는지 졸음과의 사투가 시작되었다. 졸면서 걷는 묘기를 부리기도 했다. 아침에 재정비하고 출발하느라 시간이 미처 없어서 커피를 마시지 못한 날은 커피믹스 가루를 입에 통째로 털어 넣고 물로 가글 하듯이 헹궈 마시면서 걸었다. 그래도 졸렸다. 말수가 급격히 줄었다.


  늘 겉으론 밝았지만 남모르게 운 적도 있었다. 우리 조가 씻는 순서가 늦게 배정이 되어 못 씻고 자게 되었다. 새벽에 씻고 싶었는데 나만 안 깨우고 몇 명 여자들이 씻고 왔다. 뒤늦게 일어나 부랴부랴 혼자 씻으러 갔는데 왜 자꾸 눈물이 흐르던지. 나처럼 못 씻고 뒤늦게 온 다른 여자 대원이 와서 애써 눈물을 감췄지만, 퉁퉁 부은 눈까지 가릴 수는 없었다. 참 별것도 아닌 걸로 울었다.


  서울로 들어서니 저절로 군침이 도는 맛있는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다. 길거리를 다니는 예쁜 옷차림의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일상생활의 그리움이 밀물처럼 한꺼번에 밀려들어 왔다. 약간의 울적함을 안고 서울대에 도착해 몸에서 나는 쉰내와 함께 차가운 맨바닥에 누워서 잤다. 이제는 머리만 바닥에 대면 어디서든지 잘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


  대망의 마지막 날! 아직도 도착하는 그 순간의 감격을 잊을 수 없다. 적당히 흐려서 덥지도 않고 바람도 시원한 날이었다. 오늘을 위해 여태까지 날씨가 그렇게 짓궂게 굴었을까? 걷는 키로 수도 적당하고 최상의 컨디션이었다. 임진각을 향하여… 5킬로미터 남고, 4킬로미터 남고... 3.2.1… 와- 점점 결승점이 가까이 왔다. 두근두근.



  국토대장정을 다녀와서 그동안의 생활을 청산하고 난 새롭게 태어났다. 국토대장정으로 기른 불굴의 의지와 끈기로 미친 듯이 연애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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