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의 무게
그리스 신화에 시시포스는 신을 속인 죄로 무거운 돌을 산 위로 밀어 올리는 벌을 받는다. 사력을 다해 산 정상에 돌을 올리지만, 돌은 아래로 굴러 떨어 지기를 반복한다. 매일 돌을 나르는 것이 형벌인 것처럼 세상에 무거운 것을 옮기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마는 난 항상 가방을 무겁게 들고 다녔다.
학창 시절 빈 가방을 달랑거리며 들고 다니던 친구들 사이에서 난 온갖 교과서를 넣은 무거운 가방을 메고 다녔다. 쓰지도 않는 온갖 종류의 펜들을 가득 채워 터질 듯이 두툼한 필통도 가방에 아령 한 개의 무개를 거뜬히 더해주었다. 특히 독서실에 갈 때 그 가방의 무게는 가히 상상을 초월했다. 마치 그날 하루 동안 전 세계의 지식을 모조리 흡수하겠다는 기세로 가방에 온갖 책을 다 넣었다. 그런 나를 보며 어른들이 꼭 하는 한마디가 있었다.
“공부 못하는 애들이 가방만 무겁게 가지고 다닌다던데…….”
수능을 보고 온갖 교과서, 문제집, 자습서로부터의 자유를 선포하자마자 바로 교대에 입학하여 전공 서적과 더 많은 교과서와 지도서의 무게에 짓눌리게 되었다. 임용고시 합격 후엔 달라졌을까? 학교로 출근하는 길에 만난 교무부장님께서 내 가방을 들어보시고는 너무 무거워서 ‘벽돌’을 넣고 다닌다는 내 말을 곧이곧대로 믿으실 정도였다.
“도대체 벽돌은 왜 들고 다니는 거야?”
“아… 체력단련 중입니다.”
연애할 때 남자친구가 여자친구의 조그만 가방을 들어주는 모습이 채신머리없어 보인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화장실 갈 때 남자친구에게 가방을 맡기고 가기도 하고, 여자친구 힘들다며 종일 가방을 대신 들고 다니기도 한단다. 그건 어디까지나 작은 가방일 때의 이야기다. 난 남자친구에게 가방을 맡긴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건 결혼한 지금도 마찬가지다.
“가방 이리 줘. 내가 들어줄게.”
“아냐, 이건 내 패션의 일부야. 내가 메는 게 더 편해.”
말은 이렇게 하지만 사실은 가방이 너무 무거워서 남편에게 한 소리 들을까 봐 손도 못 대게 하려는 것이다. 남편은 어디 나갈 때 짐이 무거운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가볍게 좀 다녀. 뭘 그렇게 넣고 다니는 거야?”
정말 신기한 게 어디 놀러 가서 야외에서 뭐가 필요한 상황이 오면 신랑의 가벼운 가방과 주머니에선 마치 도라에몽의 마법 주머니처럼 필요한 것이 쏙쏙 잘도 나온다. 그러나 정작 무게만 무거운 내 가방엔 그 흔한 물티슈 한 장이 없다.
슬그머니 내 가방을 들여다보았다. 읽을 책, 혹시 다 읽으면 이어서 읽을 책, 울트라 맥스 사이즈의 핸드폰, 아이패드와 장착용 키보드, 화장품, 필기도구들이 줄줄이 나온다. 그렇다. 책이 문제였다. 어차피 아이들과 밖에 나가면 읽을 시간도 없는데 왜 항상 갖고 나가는지 나도 모르겠다. 실제로 밖에 나가서 가방 안의 물건들을 요긴하게 쓴 적이 몇 번이나 있었던가?
그동안 살아오면서 삶의 무게에 아니 가방 무게에 짓눌린 어깨가 꽤 듬직해졌다. 입시, 취업, 직장에서의 업무에 치여 고단하고 힘겨운 30대까지의 삶은 고스란히 가방 무게로 전해졌다. 무거운 가방을 메고 걷다 보면 점점 시선은 바닥을 향하게 된다. 무거운 돌을 나르던 시시포스도 산을 오르며 경치를 감상할 여유 따윈 없었을 것 같다. 잔뜩 예민해져서 작은 일에도 불쑥 화가 치밀어 오른다.
2023년은 나에게 굉장히 의미 있는 해다. 바로 내 나이 마흔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부터의 내 모토는 ‘여유’이다. 맥시멈리즘으로 살아온 인생을 청산하며 가볍게 훌훌 털어버리고 새털처럼 살아보고자 한다. 18세기 프랑스의 작가, 볼테르는 “인생을 즐기기 위해서는 살아가는 것의 대부분을 가볍게 건드려야 한다.”라고 말했다.
나는 이미 충분히 훌륭하다. 자꾸 뭘 더 욕심을 내는가. 아등바등 무거운 가방을 짊어지고 30대를 열심히 살았다면 마흔은 이제 여유를 갖고 이미 갖춘 품위와 교양으로 품어주는 나이이다. 나는 시시포스와 다르다고 생각했다. 목적 없이 무거운 돌을 나르는 삶이 아니라 꿈을 향해 나아가고 있기 때문에 가방의 무게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삶에 있어서 여유란 무엇인지. 왜 중요하고 의식적으로 여유를 갖고자 노력해야 하는지.
항상 짐이 많아 작은 가방은 아예 사본 적이 없는 터라 여전히 큼지막한 캔버스 가방을 어깨에 메 본다. 짐을 빼고 빈 가방만 덩그러니 메려니 너무 쭈글쭈글하다. 아이패드라도 슬며시 넣는다. 12.9인치, 스마트 키보드까지 장착한 터라 이미 벽돌 한 장의 무게이다. 다시 뺀다.
마흔이라는 나이의 무게가 가벼워지도록 살아야겠다. 마흔에 남은 인생은 여전히 길다. 어차피 정상까지 돌을 굴려야 하는 것이 운명이라면 그 돌의 무게를 조금 가볍게 해 보자. 내 인생의 가장 빛나는 오늘을 가볍게 사랑하자.
*대문사진 출처: 티치아노의 <시시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