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경험의 설렘
그해 겨울은 추웠다. 4년간의 공든 탑이 무너졌다. 임용고시 낙방 후 노랗게 변해버린 한국 하늘을 등지고 낯선 곳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보통의 임고 재수생들처럼 1학기 기간제로 학교에서 일하다가 2학기에는 공부만 하며 시험을 준비하고 싶지 않았다. 합격한 친구들과 똑같이 바로 취업 전선에 뛰어들어 그 경력이라도 인정받고 싶었다. 서울시 교육청 홈페이지를 뒤적이다가 ‘중국청도이화한국국제학교’에서 1년 기간제 모집 공고 글을 봤다. 우리나라 사람에겐 맥주의 도시로 알려진 칭다오에 있는 초, 중, 고등학교 통합된 한인 사립학교였다.
깊이 생각하기도 전에 덜컥 면접을 보고 합격 연락을 받았다. 급하게 여권 및 서류를 준비했다. 나처럼 시험에 떨어진 또래 선생님 두 분, 사정상 초등교사를 하다가 젊은 나이에 퇴직하신 선생님 한 분, 자녀들 공부를 위해 가시는 선생님 두 분 그리고 중고등학교 선생님 세 분. 사실상 면접 본 사람들 모두인 9명이 동방항공을 이용하여 중국 칭다오로 출발했다. 인천공항에서 비행기로 50분밖에 걸리지 않는 곳이지만, 국경을 넘어 다른 나라에서 일한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경험이었다.
처음엔 영어 전담 교사로 뽑혀서 가게 된 것이었는데 사정상 6학년 담임에 방과 후에 태권도를 지도해 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사실 담임도 해본 적 없었지만, 언어의 장벽이 높은 영어 수업도 부담이었기에 오히려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처음이라 서툴고 모든 게 어설펐지만, 중국이라는 낯선 환경 앞에서 다 작은 일로 여겨졌다.
도착하자마자 중국어가 유창한 현지 선생님들의 안내로 살 집을 알아보았다. 기본적인 생필품을 살 수 있는 마트와 학교 오는 길도 안내받았다. 중국어로 그야말로 간단한 인사 정도만 할 수 있는 내가 난퇀촌 주민이 되었다. 첫 출근을 앞두고 새 학기 준비기간을 보내고 있는 것인지 내가 초등학교 1학년 입학생이 된 것인지 헷갈렸다. 그래도 여행 온 것처럼 흥분되고 설레어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사실 중국은 어렸을 때부터 동경하던 곳이었다. 나의 중국 사랑은 홍콩 액션 영화로 시작되었다. 매주 금요일 저녁마다 방영해 준 TV 외화 시리즈 ‘판관 포청천’으로 가슴이 뜨거워졌고 성룡, 이연걸 등이 연기하는 영웅호걸들을 보면서 무림의 고수가 되는 꿈을 남몰래 꾸었다. 이상하게 뜻 모를 중국 노래가 좋고, 높낮이가 다른 성조가 널뛰기하는 중국어를 들으면 가슴이 덩달아 뛰었다. 언젠가 ‘청도이화한국국제학교 행정실’에 근무하는 조선족 실무원들이 이 학교에 왜 왔냐고 물었다. 다짜고짜 판관 포청천 주제가를 불러주었다. 중국이 너무 좋아서 왔다는 나를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는 그들의 눈빛이 아직도 생생하다.
학원처럼 덩그러니 칠판 하나에 책걸상만 놓인 비좁은 공간에서 18명의 6학년 학생들을 마주했다. 나처럼 어린 선생님은 처음 만났다고 했다. 호기심 어린 눈빛의 아이들 앞에서 내가 제일 떨었던 것 같다. 낯선 나라에 먼저 와서 그래도 나보다 먼저 적응했다고 아이들이 나를 많이 도와주고 따라주었다. 주로 사업을 하시는 부모님을 따라 중국에 살고 있지만 중국 사람들에게 적대감이 상당한 것 같았다. 친구 한 명이 전학을 갈 때 모두가 울만큼 순수한 아이들이었지만, 학교 스쿨버스 밖으로 현지 중국인들에게 욕하고 자기들끼리 낄낄 웃는 아이들의 모습이 굉장히 낯설게만 느껴졌다.
한 달을 일하고 나니 학교에서 노란 월급봉투를 주었다. 월급은 빳빳한 위안화로 지급되었는데 현지에서 쓸 돈 일부만 남겨두고 나머지 돈은 부모님께 보내드렸다. 월급일 즈음엔, 학교에 일명 ‘환치기 아저씨’가 찾아왔다. 우리는 그를 통해 저렴한 매매수수료를 지불하고 한국 돈으로 바꿔서 바로 한국 계좌로 넣을 수 있었다. 남은 돈은 은행을 이용할 환경이 여의치 않아 침대 밑에 숨겨 보관했다. 내가 중국에 있을 때 환율이 점점 올라서 170만 원으로 시작했던 월급이 200만 원이 넘어가는 기쁨을 누리기도 했다.
주말이나 퇴근 후 다른 선생님들은 인근 유명한 산이나 관광지로 놀러 다니기도 했는데 나는 주로 임용고시 공부하며 시간을 보냈다. 큰 마트에 가끔 들러 중국 과자와 주전부리들을 한 아름 사 오곤 했다. 마트에 들어서는 순간 “환잉꾸아닝”하는 힘찬 소리와 함께 마트 입구에서 파는 이국적 향신료를 뿌린 닭튀김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소시지에 옥수수가 콕콕 박혀있는 핫바는 가격마저 착해서 갈 때마다 잔뜩 사다 쟁여놓고 먹었다. 망고, 체리 같은 과일도 너무 싸서 실컷 사다 먹었고, 나뭇가지에 주렁주렁 매달아 놓고 팔던 우리나라 감귤과 비슷한 과일도 단골 쇼핑템이었다. 요즘은 우리나라에서도 매장에서 여기저기 생기기 시작한 탕후루도 매일 먹었는데, 바삭하고 깨지는 식감 안에 새콤한 과일이 아주 중독성이 있었다.
가끔 주말엔 조금 멀리 있는 짝퉁 시장에 가서 옷을 사기도 했다. 이동 수단은 거의 택시를 이용했는데 나중엔 학교에서 짬짬이 배운 중국어 실력을 발휘해서 ‘저 앞에서 우회전해주세요, 어디 어디까지 가주세요’ 등의 말을 할 수 있었다. 출발 후엔 입을 꾹 다물고 엄청난 속도로 질주하는 택시에서 제발 무사히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게 해달라고 두 손 모아 기도하곤 했다.
누구나 첫 경험의 설렘을 안고 살아간다. 나의 첫 학교 경험은 낯선 나라에서 시작되었기에 무엇보다 더 특별하게 다가온다. 어리바리하게 중국에 입성하여 좌충우돌 1년을 겪었다. 그러나 돌아올 땐 공항에서 사람들이 계속 나에게 중국어로 길을 물어볼 정도로 중국 사람이 다 되어서 돌아왔다. 공업지역이라 유달리 먼지가 많고, 바람도 세고, 추웠던 중국 칭다오. 하지만 그 나라가, 그 학교가 나의 추웠던 그해 겨울을 따뜻하게 해 줬으니 참으로 신기한 노릇이다. 매년 새 학기를 맞이할 때마다 그곳에서의 선생님들, 첫 제자들에 대한 추억이 아련하게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