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에 대한 고찰
어머니가 죽고 아버지 쪽 친척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그리고 그동안 어머니가 도맡아서 하셨던 할아버지, 할머니 제사를 누가 가져갈 것인지에 관해 이야기했다. 큰며느리는 이제 없어도 그 의무는 계속 남았던 걸까. 그 딸인 내가 어엿하게 결혼까지 했으니 제사를 가져가라고 했다. 아버지는 아무 말이 없었다. 나는 바로 거절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누군가에게 짐을 지우는 명절은 더 이상 용납할 수 없었다.
어린 시절 나는 명절이 참 좋았다. 분주히 움직이는 어머니와는 반대로 친척들이 빨리 오기만을 기다리는 내 시간은 정말이지 만화 드래곤볼에 나오는 ‘정신과 시간의 방’에 갇힌 듯 천천히만 흘렀다. 다들 고향을 찾아가 온 동네가 텅 빈 듯한 조용한 아파트 주차장을 하염없이 내다봤다. 어머니가 고되고 힘든 것도 모르고 이제 오나 저 제오나 친척들만 기다렸다. 벨이 울리고 작은어머니, 작은아버지, 고모, 고모부, 사촌 동생, 오빠, 언니들이 현관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시끌벅적한 명절이 시작되었다. 신발장에 더 이상 공간이 없어 문 밖에까지 넘쳐나는 신발들이 아련한 추억으로 남는다.
사실 돌이켜보면 명절이 낀 달 내내 어머니의 표정이 어두웠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할아버지를 모시기 시작하면서 일 년에 4번이 넘는 제사를 물려받았다. 10남매의 큰며느리로서 친척들이 오기 전부터 그들이 돌아가는 순간까지 명절의 무게를 오롯이 감당해야 했다. 달력에 추석이나 설날이 가까워지면 몇 주 전부터 차례 지낼 음식과 그 많은 시댁 식구 먹일 식재료를 사들이는 것으로 어머니의 명절이 시작되었다.
차례상에 놓일 대부분의 고기, 생선, 채소는 콜밴 하는 아버지가 친분이 있는 시장 사람들에게서 사 왔다. 상가 떡집에서 필요한 떡을 미리 주문하고, 나머지 필요한 것은 어머니가 직접 근처 대형마트에서 샀다. 차례에 쓰일 과자들, 종합 젤리, 알록달록한 사탕, 한과, 산자 등을 샀는데 늘 아무도 먹지 않아 남곤 했다. 몇 년간 아무도 먹지 않는 걸 보고 땅콩 샌드 국희나, 어머니가 좋아하는 빠다코코낫, 그리고 그때그때 내가 먹고 싶은 과자로 대체했다. 그래도 약과와 산자는 늘 빠지지 않았다.
갖가지 재료가 준비되면 어머니는 밤낮으로 쉴 새 없이 바빠졌다. 제사 탕국을 한 솥 가득 끓여놓고, 그 안에 들어간 무와 고기들을 건져서 김이 펄펄 나는 뜨거운 채로 요리조리 돌려가며 잘게 잘라서 다시 넣고 끓였다. 작은어머니가 사촌오빠들이 내 어머니의 탕국이 본인이 끓인 탕국과 맛이 다르다고 했다며 칭찬한 적이 있다. 어머니는 조그마한 냄비에 한 번 먹을 양만 끓이는 것과 엄청나게 큰 솥에 여러 날 여러 식구가 먹을 어마어마한 양을 끓이는 것에서 맛의 차이가 있을 거라고 했다.
차례 음식 말고도 식구들 식사 때 먹을 음식도 미리 이것저것 준비했다. 나박김치 무를 야무지게 썰어놓고 시원하게 국물을 내어서 김치냉장고에 한가득 쟁여놓았다. 도라지, 고사리, 숙주나물 등의 나물도 오물 쪼물 무치고 식혜도 만들고, 반찬거리도 준비해야 했으며 간식으로 먹을 과일도 잔뜩 사서 저장해 두고, 전 부칠 재료들은 미리 사전에 손질을 다 해놓았다.
명절 전날 작은어머니들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몇 명이 오기 시작하면 슬슬 준비해서 종일 전을 부쳤다. 셋째 작은어머니가 손끝이 야무져서 음식을 젠가처럼 겹겹이 쌓아 올리는 것 잘했고, 삶은 계란도 알이 깨어진 모양으로 지그재그로 예쁘게 잘라서 차례상에 올렸다. 넷째 작은어머니도 꼬치 전과 동그랑땡 부치는데 선수였다. 그러나 막내 숙모는 뒤늦게 합류한 멤버라 차례를 같이 지낸 게 몇 년 안 되고 멀리 부산에 사는 둘째 작은어머니는 거의 일이 끝날 때쯤 늦게 도착했다. 명절이 끝날 무렵에는 고모들이 또 한차례 몰려왔다 가면서 어머니 일을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었다.
나는 사촌들과 명절 내내 신나게 노는 것에만 정신이 팔려있었다. 사촌 동생들만 십여 명을 몰고 다니면서 동네 놀이터를 쪽수로 제압하기도 하고, 밤새도록 방에서 카드 게임도 했다. 그동안 갈고닦은 공기 실력을 뽐내기도 했으며, 밤에는 이불 덮고 무서운 이야기도 했다. 어머니의 고됨은 신경도 쓰지 못했다.
내가 중학생이 되고 집에서 모시던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가족끼리 한바탕 싸운 뒤 친척과의 왕래가 끊어졌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 뒤로도 본인 손으로 계속 제사와 차례를 지냈다. 조상님을 잘 모셔야 자손들에게 복이 돌아간다고 말하곤 했다. 대신 간소하게 우리끼리만 제사를 지냈다. 어머니, 아버지가 오손도손 전을 부치고 가끔 나나 동생이 가서 같이 거들기도 했다. 양이 예전에 비해 적어서 훨씬 금방 끝난다며 좋아했다. 나는 저녁때쯤 밤을 깎았다. 밤 깎는 것 외에도 제사 지낼 때 태우는 지방 쓰기가 내 역할이었다. 미리 써놓은 한문을 보고, 작은 종이에 붓펜으로 심혈을 기울여 고대로 따라 그렸다.
우리끼리 제사를 지낸다고 언제나 화목했던 것은 아니었다. 장 보는 것부터, 제사 음식을 놓는 위치를 가지고도 어머니 아버지는 늘 다투었다. 아버지는 매년 제사를 지냄에도 불구하고 음식 놓는 순서를 항상 까먹었다. 그러면 그냥 격식에 너무 얽매이지 않고 대충 하면 좋을 것을 되려 본인이 맞고 우리가 잘못 알고 있다고 역정을 냈다. 어머니도 아버지에게 지지 않고 어떻게 맨날 하면서 그걸 까먹느냐고 핀잔을 주었다. 서로 잡아먹을 듯이 싸웠지만 결국은 웃음으로 마무리되곤 했다. 한바탕 웃고 떠들면서 제사상에 음식 차리고 조상님이 찾아와 음식을 드시는 동안 불 끄고 잠깐 다른 방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다시 물 떠다 드리고 우리는 음복했다. 지방도 태우고……. 그렇게 또 한 번의 제삿날이 지나갔다.
너무나 다행스럽게도 난 제사와 차례를 안 지내는 시댁을 만났다. 나는 이제 제사 안 지낸다고 자랑할 틈도 몇 년 주지 않고 어머니는 내 곁을 떠나버렸다. 더 이상 내 인생에 제사는 없다. 어머니가 지금도 살아있었더라면 제사를 계속 지내셨을까? 가끔 그때 우리끼리 제사 지낼 때의 웃음소리가 떠오르곤 한다.
*사진 출처: Pixabay 무료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