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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콩작가 Sep 23. 2024

가을 곳간

비워야 채워지는 곳간

  온 들녘에 익어가는 벼들이 출렁거리며 황금물결을 만드는 계절. 알알이 잘 여문 벼를 바라보는 농부의 마음은 잘 자란 자식을 흐뭇하게 지켜보는 부모의 마음일까?


  옷장에 짧은 옷을 치우고 긴 옷을 슬슬 꺼내놓기 시작했다. 벌써 내복을 꺼내 입은 나의 우려와는 달리 6살 둘째는 민소매 티를 입겠다고 버텼다. 마음에 드는 바지가 없어 빨래하려고 쌓아둔 옷더미에서 기어이 찾아와 주섬주섬 입고 있는 아이를 지켜봤다. 자식 농사는 모든 농사 중에 최고 난도임에 틀림없다.


  아이를 유치원에 바래다주고 오는 길에 만난 가을은 내 마음에 울긋불긋 불을 지폈다. 축축한 낙엽의 냄새가 코끝에서 채 마르기도 전에 집에 돌아와 못다 한 부엌일을 마무리하기 시작했다. 식탁 위엔 아이들이 아침으로 먹다 만 간장계란밥이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추수의 계절인 가을은 식재료가 풍성해진다. 그 명성에 걸맞게 식탁도 다채로워져야 하거늘 우리 집 식탁은 늘 빈약하기 짝이 없다. 끼니때마다 한 그릇 음식으로 때운다. 밑반찬을 따로 만들어 두지 않아, 냉장고는 늘 식재료 빼곤 텅텅 비어있다. 집에 먹을 게 변변치 않아서 시켜 먹는 게 아니라 진짜로 먹을 게 하나도 없어서 사 먹는다. 오늘은 계란마저 떨어져서 진짜로 큰일 났다.


  어린 시절, 어머니는 냉장고를 가을 곳간처럼 늘 꽉 채워 놓으셨다. 그럼에도 냉동고 한 개를 더 들여놓기를 언제나 바라셨다. 그러나 저녁마다 하시던 말씀은 “오늘 뭐 해 먹지? 왜 맨날 해 먹을 게 없을까?”였다. 나 또한 어머니만큼은 아니지만 한 달에 한 번씩 장을 봐서 식재료를 냉장고와 창고에 그득히 쟁여두는 것을 좋아한다. 한번 먹을 만큼씩 포장해서 냉동실에 차곡차곡 쌓아두는데, 장을 봐온 날은 어찌나 든든하고 마음이 여유로워지던지! 하지만 ‘뭐 해 먹지?’에 대한 고민은 대를 이어 거듭된다.


  가을이 풍요롭다는 건 오랫동안 저장이 가능한 곡식을 추수하여 곳간 가득히 쌓아두기 때문이 아닐까? 쌀, 보리, 조, 콩, 기장의 다섯 가지 곡식을 일컬어 오곡이라고 하고 사과, 배, 감, 밤 등 여러 과일을 백과라 한다. 곳간 가득히 오곡백과로 채워진 가을의 수확은 그야말로 축복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먹을 것이 귀하던 옛날에는 추운 겨울을 대비해 곳간을 가득 채우는 것이 미덕이었지만 현대에 와서는 굳이 곳간을 가득 채워야 할까? 집 앞을 나서기만 하면 언제든 신선한 식재료를 구입할 수 있는 마트형 곳간들이 즐비해 있다. 곳간이 꼭 집에만 있을 필요는 없단 소리다. 또한 이제는 영양실조보다는 과식으로 인한 비만과 과체중을 걱정하는 시대인지라 무엇으로 곳간을 채울지도 고민스럽다.


  나는 한 달 식비 절감을 위해 한 달에 한 번 식재료를 대용량으로 구입한다. 4인 가족 한 달 식비 30만 원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실제로 몇 년째 프로젝트를 진행해 보니 생필품을 제외한 음식만을 따진다면 이 돈으로 어느 정도 한 달 살기가 가능한 경지에 이르렀다. 냉동실에 저장이 가능한 식재료를 주로 사고 신선한 채소류는 그때그때 집 앞 알뜰 시장에서 조금씩 산다.


  주로 장 보는 식재료 중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고기류이다. 품질 좋은 고기를 사고 싶지만 눈물을 머금고 가장 저렴한 호주산 돼지고기를 고른다. 처음엔 냉동육을 샀는데 남편이 고기 자르는 게 너무 힘들다고 눈물로 호소하는 바람에 조금 더 비싼 냉장육으로 산다. 삼겹살, 목살 이렇게 두 덩어리만 사 와도 벌써 10만 원 돈이다. 집으로 가져온 고기는 냉동실에서 살짝 얼렸다가 남편의 화려한 칼 쇼와 함께 적당한 두께로 썰어 소분하여 다시 냉동실로 들어간다. 요즘엔 이것도 힘들어져서 아예 잘려 나온 고기를 구입한다. 이렇게 저장해 둔 고기로 한 달을 살아간다.


  과일은 한꺼번에 많이 사지 않는다. 과일 킬러인 둘째가 늘 불쌍한 표정으로 과일을 사달라고 졸라도 어쩔 수 없다. 과일은 나무에서 열리는 사탕이라고 들었다. 자연당이라고 하지만 혈당을 높이는데 일반 당류와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가끔, 마음 약한 남편이 ‘그래도 애가 저렇게 좋아하는데 이거 하나만 살까?’ 하면 마지못해 소포장되어 있는 것으로 사곤 한다.


  나와 남편은 구석기 다이어트, 키토제닉(저탄수화물•고지방), 당질제한식, 간헐적 단식을 적당히 버무린 식단으로 최대한 탄수화물 섭취를 줄이고 단백질과 채소류를 중심으로 식사를 해결한다. 하지만 아이들 식사가 늘 고민이다. 아무래도 반찬으로 맛있는 게 하나씩 있어야 밥을 먹는지라 주로 냉동식품을 안 떨어지게 사다 놓는 편이다. 그래서 아이들 용으로 치킨너겟, 고기산적, 가끔 간식류로 식빵, 핫도그 따위를 냉동실에 저장해 둔다.


  우리 집 곳간은 주방에 냉장고, 수납함 겸용 팬트리장, 그리고 보조 주방에 3단 서랍, 식료품 선반, 작은 냉동고로 이루어져 있다. 냉동실엔 주로 고기류, 아이들 반찬, 간식용인 냉동 간편식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보조주방에 서브용 작은 냉동고엔 열심히 우린 사골로 꽉 차 있다. 냉장고에는 달걀, 치즈, 우유, 버터, 채소류를 상비해 두고 보조주방 선반에는 쌀, 찹쌀, 콩 등의 곡식류를 보관한다. 그 외에 팬트리장에는 각종 영양보조식품, 커피나 차 종류, 근성장을 위한 프로틴파우더, 참치, 카레, 시리얼 따위가 있다.


  나의 곳간은 한 달을 주기로 채워지고, 비워지기를 반복한다. 가을은 본디 곡식을 추수해 곳간에 차곡차곡 쌓아야 할 계절이지만, 쌓기만 하면 순환이 되지 않으니 오히려 비워야 새 음식을 채워 넣을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오랜만에 냉장고에 오래된 음식들을 모두 꺼내 해치워야겠다. 장 볼 때가 가까워지고 있다. 그나저나 계란은 꼭 사다놔야겠다.





*대문사진 출처: Pixabay 무료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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