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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MK Sep 30. 2024

언젠가 나도 김연경?!

천하제일 배구대회

  초등학교 때 달리기 잘하는 옆반 남자애를 좋아했다. 달리기 말고는 아무것도 내세울 게 없는 그냥 선생님께 잘 혼나는 아이로 기억되는 아이였다. 어린 시절 나의 이상형은 운동을 잘하는 사람이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아름다운 처녀 사냥꾼 아탈란테는 수많은 구혼자에게 달리기 시합을 해서 자신을 이겨야 선택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가볍게 입은 남자들과 달리 아탈란테는 무장을 하고 달리는 데도 아무도 그녀를 이길 수 없었다. 그녀에게 반한 히포메네스는 발만큼이나 머리를 잘 쓸 줄 아는 청년이었다. 황금 사과 세 개를 손에 넣어 달리는 중간에 하나씩 떨어트리면서 아탈란테가 사과를 줍느라 잠깐 멈추는 사이 열심히 달려서 결국 시합에서 승리하여 결혼에 성공했다.


    나이가 들면서 나의 이상형에도 조건이 붙었다. 나보다 운동을 잘해야 했다. 구체적으로 어떤 운동 종목을 잘해야 하는지, 운동선수면 무조건 합격인지에 대한 명확한 내용도 없는 너무나 막연한 남자 고르기 기준이었다. 내가 운동 신경은 타고난 편이라 어떤 스포츠든 중간 이상은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운동에 있어서는 웬만한 남자들을 우습게 여기기도 했다. 내가 보는 세상이 다인 줄 알았던 철 모르던 시절이었다.


  그러던 내 눈앞에 실로 놀라운 경공술(*경공술이란 중국무술에 나오는 말이다. 몸을 가볍게 하는 기술로 빠르게 달리고, 디딜 곳 없는 벽을 오르고, 도약력을 높이고, 불안정한 장소에서 균형을 잡는 단련법을 말한다)을 펼치며 난간을 타고 달리는 사내가 나타났다. 대학교 3학년 때였다. 그는 높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떨어지면 크게 다칠 수 있었던 작은 천 변 다리의 좁은 난간을 따라 뛰어다녔다. 그것도 술을 먹고. 나도 술을 먹으면 나무를 타고 오르던 때라 한눈에 그의 내공을 알아챌 수 있었다. 그와 함께라면 어떤 난관도 헤쳐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뛰어난 무공에 비해 부끄러움이 많았던 그 덕분에 우리는 비밀 연애를 했다. 대학교 캠퍼스 주위를 함께 걷다가 아는 사람이라도 나타나면 반대편으로 빠른 속도로 뛰었다. 졸업 때까지 우리의 만남은 단 한 사람에게도 들키지 않았다.


  우리는 초야의 숨은 고수처럼 조용히 살다가 결혼 후 ‘탄탄 배구’ 클럽이라는 무림에 들어가게 되었다. 혜성처럼 나타난 우리 부부는 약 2년간 밤낮으로 배구 기술을 수련하여 실력이 단기간에 일취월장했다. 체육관에서 클럽활동을 안 할 때도 유튜브를 보면서 자세를 익히고 좁은 집에서도 서로 배구공을 주고받으며 연습에 또 연습을 거듭했다. 방문에 공을 달아놓고 오가며 한 번씩 쳐보기도 했다. 신혼집에서 난다는 고소한 깨소금 냄새 대신 파스 냄새가 집안을 가득 채웠다.


  내공이 차곡차곡 쌓여가던 어느 날 우리의 배구 생활이 빛을 보기도 전에 막을 내리고 말았다. 강스파이크로 날아오는 공을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언더핸드 자세로 받아내며, 옆으로 날아오는 공을 받기 위해 몸을 날려 공을 살리고 그대로 한 바퀴 구르는 롤링까지 완벽히 재현해 내려는 찰나 임신하게 된 것이었다. 배구 대회는 나가보지도 못했다. 처음 배구 클럽에 들어갔을 때 배구 클럽 감독 겸 코치님이 아이가 있냐고 물었었다. 그때 해맑게 아직 없다고 대답하자 감독님은 나중에 애 낳고 다시 오란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났다. 힘들게 가르쳐서 시합을 해볼 만하면 출산하러 가는 많은 사례를 이미 겪었을 터였다. 아쉽지만 배구 실력이 어디 가겠느냐며 다음을 기약하고 무림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첫째가 태어나고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될 무렵 둘째가 생겼다. 남편은 내가 가지 않는 배구 클럽에 몇 번 더 나가다 재미없다고 그만뒀다. 타고난 점프력과 강한 어깨의 힘과 손목 스냅의 탄력으로 강스파이크를 날리기 직전이었다. 그나마 직장인 학교에서 배구를 조금 하다가 허리 디스크가 도져서 배구는 아예 그만두고 헬스의 세계에 뛰어들었다. 그런데 난 배구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수영과 달리기를 시작했지만, 배구 생각만 하면 저 멀리서 북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사실 나는 배구를 하기엔 키가 작았다. 같은 스파이크를 때려도 네트 위로 각도가 안 나오니 자꾸 아웃되거나 상대편이 받기 쉬운 공을 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공격보다는 가운데서 공을 받는 수비나 우리 편 공격수 바로 뒤의 포지션에서 가끔씩 넘어오는 페인트에 목숨을 걸 수밖에 없었다. 다들 포기한 멀리 날아가는 공을 끝까지 쫓아가서 받아낼 때의 짜릿함이란! 내가 몸을 날려 공을 받아낼 때마다 구하기 어려운 비법서로 익힌 무공으로 적을 무찌르는 것처럼 통쾌했다.


  지금은 또다시 초야에서 소리 소문 없이 숨 고르기를 하며 때를 기다리고 있다. 언젠가 때가 오면 반드시 내공을 다시 쌓아 배구 대회에 나가리라. 어제는 남편이 몇 달 전부터 시작한 풋살 경기를 하다가 눈에 시커멓게 아이라인을 그려서 집에 들어왔다. 같은 편이 걷어내려고 세게 차올린 공에 직통으로 눈을 맞은 것이다. 이미 그의 오른쪽 엄지발톱은 밟혀서 새까만 매니큐어를 바른 지 오래다. 하루가 멀다고 상처를 입고 오는 그를 보면서 안쓰러움보다는 나도 무림의 세계에 뛰어들고 싶은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익힌 헬스라는 내공으로 풋살 무림의 최고수가 되어가고 있었다.


  매년 초에 한 해 계획을 구체적으로 세우고 있다. 벌써 5년째 비싼 플래너에 언젠가 배구 대회에서 이름을 떨치는 최고의 배구왕이 되겠다는 야심 찬 목표를 꾹꾹 눌러썼다. 이번에도 남자 고르는 기준처럼 애매모호한 비전이지만 내 머릿속엔 벌써 여자 배구 최고의 선수 김연경처럼 배구를 하는 나의 모습이 영화처럼 상영되고 있다. 상상 속의 나는 배구 코트 위를 날아다닌다. 아직은 적당한 때를 기다리고 있지만 곧 복귀할 천하제일 배구대회 독무대를 오늘도 그려본다.


*대문사진 출처: 니콜라스 콜룸벨 <아탈란테와 히포메데스의 경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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