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달파도 꽃은 핀다

부직포 화분에서 자라는 고추 나무 이야기 <고추테리어>

by 눈항아리

화분에서 자라는 고추의 삶은 애달프다. 모진 비바람과 태양볕도 모자라, 무관심이라는 시련까지 닥쳐왔다. 부직포 화분은 다락방 한 구석 먼지 쌓인 가구처럼 마당 한쪽에 우두커니 서 있다.


극심한 가뭄 속 고추나무, 딱 그 이름에 어울리는 모습이다. 너덜너덜한 고춧잎은 바람에 흐느적 거린다. 축 처진 마른 잎이 서로 말려 엉겨 붙을까 몸을 부르르 떨어댄다. 한적한 시골길 귀신의 집이 이러할까. 여름 더위가 무성한데도 성마른 나뭇잎에서 소리 없이 부스럭거리는 가을 낙엽 소리가 나는 것 같다. 하긴, 귀뚜라미 운 건 한참 되었다. 여름이 너무 길긴 했다.


무심한 듯 지나치다 고추 열매 세 개를 땄다. 뾰족한 열매 끝에 채 떨어지지 못한 짙은 갈색의 푸석한 꽃을 단 아기 고추였다. 고 작은 것을 따먹으면서도, 다 마른 잎사귀에서 열매를 취하면서도 나는 미안한 마음은 눈곱만치도 안 들었다. 일상의 반복이라 즐거움도 기쁨도 어떠한 마음의 일렁거림도 없다. 매일 그 자리에 있는 존재, 이제는 일상으로 들어와 별스럽지 않은 존재, 식상한 것이 되어버린 존재. 고추는 손만 뻗으면 쉽게 취할 수 있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열매를 기다리며 애태우던 날의 기억은 아스라이 지나간 과거의 풍경 속에 남아 있을 뿐이다.


고추는 아랑곳 않고, 새로운 가지에서 새로운 꽃을 피우고 새로운 열매를 맺는다. 묵은 열매는 없다. 고추나무 아래쪽 처음 나무에 매달린 열매는 커지는 족족 다 따버렸으니까. 그래, 새로운 열매는 새로운 가지에서 열린다. 고추 꽃은 가장 높은 곳에서 피어난다.


무심한 듯 지나가는 나의 일상 속에서 나는 묵은 가지를 헤치며 지난날의 추억 속에만 잠겨 있다. 새로운 가지를 키울 생각도 없이, 새로운 꽃을 피울 생각도 없이. 작은 열매는 죄다 따먹으면서도.


한낮의 더위를 보내고 저녁 어스름이 짙어지며 고추는 조금 생기를 되찾았다. 그제야 봉긋하게 핀 하얀 꽃이 보였다. 물이 없어 쪼그라들어 안 보였나 보다. 자주 보고 살뜰히 챙겨줘야겠다.


<고추테리어>는 부직포 화분에 키우는 고추 한 그루의 이야기입니다.
반려식물과 함께 호흡하는 일상 이야기입니다.
좁은 부직포 화분 속 작은 생명에게 삶을 배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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