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아리 위, 물 찬 대야

by 눈항아리

반가운 비가 장대비가 되어 밤새 내렸다. 영동지방은 100미리까지 온다는데 100미리가 더 왔다며 남편이 반가워했다. 자신이 무슨 기상청도 아니고 정확한 밀리미터까지 어찌 측정을 한 걸까. 베란다 넘어 장독대를 보고 그러는 거였다. 항아리 위에 올려놓은 커다란 스테인리스 대야에 빗물이 한가득이었다.



재난 상황까지 치달은 긴 가뭄에 장대비가 반갑기는 하지만, 물이 한가득 담긴 스텐 대야가 불안해 보였다. 남편은 물의 엄청난 무게를 항아리가 감당할 수 있을까, 혹시나 ‘퍽’하고 한순간에 박살이 나지는 않을까 걱정이라고 했다.


그러나 남편은 항아리 걱정보다 무거운 물이 가득 든 대야보다, 아들 걱정이 우선이었다. 세차게 퍼붓는 비를 뚫고 큰아이를 학교까지 데려다줘야 하기 때문이었다. 출발 시간이 이미 늦은 터라 남편은 빗길 안전운전을 위해 항아리를 포기했다.



남편은 이미 출발했지만 겨울철 습설의 무게에 못 이겨 지붕이 폭삭 주저앉은 뉴스의 영상이 계속 생각났다. 우리도 매년 겨울마다 옥상에 올라가 눈을 치우지 않던가. 항아리를 그냥 둬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엄청나게 큰 대야를 내가 들 수 있을까? 평소에도 양손을 쫙 벌려 들어야 하는데, 물까지 가득 채운 대야를 과연 번쩍 들어 올릴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다. 비가 오는데, 옷이 다 젖을게 분명한데... 내가 해야 할까. 괜히 다치지는 않을까. 저녁에 남편이 오면 하라고 할까.


그러나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니 더 쉽고 좋은 답이 나왔다.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싶을 정도로 간단한 방법이었다.


나는 물 찬 대야를 들 힘이 없다. 그럼 바가지를 들고 가 조금씩 푸면 된다. 이렇게 쉬운 답을 두고 남편도 나도 한 걱정을 했다. 항아리가 깨진다는 생각만 했고, 물이 무겁다는 걱정을 했고, 왜 미리 대야를 엎어놓지 않았을까 후회했다.


일하러 나가는 길에 장독대에 들렀다. 왼손에 우산을 쓰고 오른손에 작은 바가지 하나를 들었다. 스텐 대야의 물을 스무 번 넘게 퍼냈다. 물이 얼마나 많은지 퍼도 퍼도 계속 남아 있었다. 삼 분의 일 정도를 남기고 양손으로 대야를 번쩍 들어 바닥에 물을 쏟아냈다. 그리고 잊지 않고 대야는 뒤집어 놓았다.



출근하니 남편은 항아리 위에 있는 대야의 물 얘기를 바로 꺼냈다. 늦은 밤에 퇴근해서 집에 가면 대야의 물부터 꼭 쏟아 버려야지 했다. 그 무거운 걸 어떻게 버리냐며 그때까지고 걱정을 하고 있었다.


“그거 깨질까 봐 내가 버리고 왔는데? 나 잘했지?”

“에이, 그래도 깨지지는 않아. 그런데 그걸 어떻게 들었어? 무거웠을 텐데.”

갑자기 나를 대단하다는 듯이, 힘센 장사를 보는 듯 선망의 눈빛으로 쳐다보는 남편이었다.

“내가 무슨 천하장산줄 알아? 바가지 가지고 서른 번 퍼냈지.”



쉬운 방법을 두고 남편은 왜 그걸 한 번에 덜렁 들 생각을 했을까. 아니다, 남편도 항아리 위의 거대한 물을 쏟아 버려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면 바가지 생각을 했을 거다. 결코 그걸 온 힘을 다해 번쩍 들지는 않았을 거다. 설마.


별 일 아니지만 나 스스로가 대견했다. 퇴근할 때까지, 하루 종일 물의 무게를 이고 지고 있었을 남편의 마음의 짐을 조금 덜어준 것 같아, 그저 나 혼자 기분이 좋았다. 긴 가뭄에 시원한 비가 주룩주룩 내려기분이 좋은 건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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