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초라해지는 순간 자판을 두드렸다. 팔이 아프다고 머리가 아프다고 몸이 아프니 잠을 자야 한다고, 아픈 걸 쓰기 싫어서 미루고 미루었던 글이다. 아픔은 전염이 되니까. 세상에 나의 아픔을 퍼뜨리지 않기 위해서라고 위안을 삼으며.
한 개인의 고통이 무슨 재난급의 거대한 폭풍이나 지진이라도 되는 양 나는 나의 아픔을 최대치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누구나 그렇지 않을까. 나의 아픔은 나에게 최대의 재난이다. 그렇지.
아팠다. 아프고 더 아플 것이다. 고통에서 헤어 나올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아픔에 주저앉고 싶은 날들도 있는 것이다. 이것이 끝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그저 고통을 음미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아프면 세상의 주체가 내가 되니까. 나는 그런 자의성을 느끼고 싶은 것인지도 몰랐다.
엉망이 되어가는 삶. 그러나 늘 나의 삶은 이랬다. 별다른 일이 벌어지지 않았지만 아픔 속에선 환경도 새로운 아픔으로 도배를 한 것처럼 느껴지는 것일 수도 있다. 설거지는 쌓였다. 팔이 아프다는 핑계로 그냥 쌓아뒀다. 무리해서 빈 곳이 생기더라도 돌려버리던 식기세척기. 그곳이 꽉 차도록 개수대를 꽉꽉 채웠다. 음식물은 대충 덮어놨다.
찬 기운과 방의 온기가 더해져 곰팡이가 생겼다. 곰팡내가 집안을 둥둥 떠다녔다. 몸과 마음이 멀쩡했다면 벌써 남편과 상의하고 없앨 궁리를 했겠지만, 그것이 당장 날아들어 독침을 쏘아대는 말벌은 아니었으니 그냥 침울하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새벽에 맡는 매캐한 그 냄새는 정말 기분이 나쁘다. 몸뚱이 큰 벌과는 다급함의 차이일 뿐 위험한 것도 몸에 안 좋은 것도 같다.
쉬지 않고 달린 날이 삼십여 일 되는가 보다. 그동안의 부족한 잠을 몰아 잔 것처럼 낮잠을 잤다. 아들을 학원에 내려주고 빈 시간 정신이 돌아왔다. 한 달 만에 마주한 나는 참 초라해져 있었다. 글을 빼면 나에게 남는 것이라고는 없는 것 같았다. 내 모습이 그리도 처량했다. 간신히 잡은 글을 내려놓다니 이런 정신머리 없는.
곰팡내 나는 집에서 엉망진창인 살림살이 속에서, 일을 하며 노동하며 정신없는 삶에 치여 정신줄을 놓고 사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 존재감이 없다고 해야 할지 존재감이 거대하다고 해야 할지.
나는 나로서, 확실한 나의 생각을 남기는 자로서 존재하기 위해 글을 놓을 수 없다. 아파도 고통 속에서도 슬픔 속에서도, 그래서 나는 글을 쓰기로 했다. 사실 자판 앞에 앉을 시간을 안 만들었을 뿐, 책상에 놓기만 하면 손가락은 저절로 움직인다. 물 만난 물고기 같다. 정말 신기한 일이지. 손가락은 자신의 존재 의미를 아는 것인지도 모른다.
생강을 까며 흙물이 묻어 까맣던 손톱. 손가락, 손목, 팔뚝, 위팔, 목 할 것 없이 어디 하나 안 아픈 곳이 없던 팔이 자판 위에서 춤을 추는 모습은 위대하다. 나의 존재가 비로소 살아 있는 듯 느껴진다. 나는 존재하기 위해 글을 쓴다. 어느새 나의 가을은 반을 달려왔다.
나는 이 길을 천천히 걸어가고 있다. 지혜롭지 않아도 괜찮다. 초라해도 괜찮다. 슬기롭지 않아도 괜찮다. 처량해도 괜찮다. 가을은 가고 겨울이 오고 곧 봄이 오니까. 천천히 달려도 도달하는 계절이니까.
삶이 초라해지는 순간 글을 쓴다. 덜 초라해지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그건 착각이라는 걸 나는 안다. 그럼에도 나는 자판을 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