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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춧구멍에 단추 끼우기

by 눈항아리

아침 출발 시간이 촉박해 밥을 먹을까 말까 고민하던 복동이는 교복이라는 의관을 정제하고 밥을 퍼먹는다. 그러더니 하는 말,

“단추가 왜 네 개야?”

‘원래 네 개였거든? 갑자기 무슨 단추 수를 세고 그러지?’

일 년 동안 입고 다닌 교복인데 단추가 몇 개인지 이제야 감이 왔나 보다. 중학생 교복은 단추가 세 개였단다. 그래서 셋 중 둘을 채우고 다녔다. 고등학교 교복을 입고도 늘 단추 둘을 채우고 다녔다. 목이 항상 헤 벌어져 있었던 이유가 있었다. 단추의 개수를 확인한 복동이는 목에 가까운 단추 하나를 빼고 세 개를 다 채운다. 단정한 모습이 썩 마음에 든다.


단추 끼우는 일은 보통이 아니다. 하복은 생활복이라서 단추 서너 개로 끝나지만 동복 와이셔츠는 단추 개수가 어마어마하다. 아침 준비 시간에 와이셔츠 단추를 잠그려면 꽤나 시간을 소모해야 한다. 단추 때문에 우리 집 중학생, 고등학생은 겨울이 시작되는 이 계절에 하복 생활복을 입는다. 그게 이유의 전부는 아닐지라도 편함이 큰 부분을 차지하는 건 맞다.


매일 셔츠를 챙겨 입는 남편도 단추 잠그는 일이 영 귀찮은가 보았다. 남편의 셔츠는 단추 서너 개가 늘 풀어져 있다. 그 아래 주르륵 달려있는 단추는 잠긴 채다. 빨래를 하다 발견하고 하나만 그런 줄 알았는데 요즘 입고 벗는 셔츠가 대부분 그렇다.


새로운 기술을 습득한 것일까. 와이셔츠를 티셔츠처럼 입고 벗는 기술. 그런데 그 기술에는 큰 단점이 있다. 몇 개의 단추를 풀어 넓어진 구멍으로 머리통을 쑥 넣는 일이야 수월한 일이지만 팔을 끼우려면 옷에 어느 정도 신축성이 있어야 하는데 단추가 엄청 많이 달린 와이셔츠 옷감에는 애초에 신축성은 고려되지 않았다. 그러나 남편은 용감하게 오른팔, 왼팔을 낑낑대며 끼우고 혼자 만족스러운 얼굴이다. 남편도 편함이 좋은 것이다. 셔츠 팔을 힘겹게 끼우는 모습을 봐선 편한 것인지 잘 가늠이 안 되지만 손가락 몇 번 꼼지락 거리지 않는 것에 만족하는 듯 보였다.


유아기 때 아이들은 벌써 단춧구멍에 단추 넣는 연습을 한다. 그런데 그 단춧구멍이라는 것이 단추가 들어가면 나오지 못하도록 만들어져야 하므로 단추보다 너무 크면 안 된다. 단추보다 1밀리미터, 커 봤자 2밀리미터이니 여러 번 연습을 해야 겨우 끼워 넣을 수 있는 수준인 것이다.


우리 집 아이들은 단추를 잘 못 끼운다. 어릴 때부터 훌러덩 벗어던질 수 있는 편한 옷만 입혀서 그렇다. 조금 커서는 셔츠 입을 일이 있으면 서투른 아이를 대신해 대신 단추를 잠가줬다. 큰 아이에게 그랬으니 그 아래 동생들은 말해 무엇하랴.


꼬마들은 아예 단추를 모른다. 여자아이들 옷은 간혹 목뒤에 콩알 단추가 달려 있는 것이 있다. 원피스도 그렇고 상의도 그런 것이 간혹 있다. 막내 딸아이는 단추의 존재를 모르고 그냥 단추는 열어 놓은 채 다닌다. 옷을 혼자 입고 벗고 세탁실에도 가져다 놓는 나이가 되었으니 신경을 안 쓰고 있다 어느 날 오후에 목뒤에 있는 콩알 단추를 헤벌쭉 열고 다니는 모습을 목격하고 얼른 잠가주곤 한다. 잠옷 하나는 목 앞 쪽에 단추가 있는데 단추는 잠가놓은 채 머리를 넣고 빼고 해서 고무줄로 되어있는 단춧구멍만 늘었다 줄었다 하는 실정이다.


여자아이들 옷은 그나마 단추가 좀 붙어 있는 실정이나 남자아이들의 옷은 아주 단순하다. 모양, 디자인 등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오로지 편리만 생각하는 옷의 디자인은 수수한 옷 본연의 기능만을 강조한다. 그리하여 우리의 아들 셋은 중학생이 되기까지 단추가 들어간 옷을 거의 접하지 못하고 살게 되는 것이다. 중학교는 체육복 착용이 가능하고 여름이면 생활복을 입기 때문에 경험상 졸업식 때 작아진 교복을 찾아 입을 때 빼고는 셔츠와 뻣뻣한 바지를 입을 일이 없다. 고로 단추를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생활 속에서 접할 기회가 전무하다는 말이다.


초중고 우리 집 아이들, 너무 편리만 좇는 것일까. 단춧구멍 끼우는 연습을 시켜야 하나? 단추를 대체할 수 있는 지퍼도 있고 신축성 있는 옷감들이 많은데 굳이 그래야 하나 싶기도 하다. 뭐 굳이 필요하다면 반복 학습을 통해 연습하면 된다. 그러고 보니 신발 끈 잘 못 묶는 아이들의 서투른 손길이 생각난다. 생활에 편리함이 더해지면서 손을 쓰는 일이 그만큼 줄어드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한다. 그런데도 게임기 버튼 조작은 어떻게 그리고 귀신같이 잘하는지 신기하기만 할 뿐이다.


자주 하는 일은 익숙해지고 잘하게 된다. 많이 사용하는 감각은 섬세해진다. 대신 사용하지 않는 능력은 퇴화되기 마련이다. 그것이 단추 끼우기가 될 수도 있다. 우리 학교 다닐 적엔 교복 윗옷에 달린 단추가 별것 아니었는데, 내 아이에게는 손 가는 일이 되었다. 참 사소한 일에서 세대 차이를 느낀다. 우리 땐 교복 대신 체육복을 입고 다니지 않았으니까. 셔츠가 아니라도 남방이라는 걸 많이도 입고 다녀서 단추에 익숙했다. 심지어 겨울 동복 재킷 위에 떡볶이 단추가 달린 더플코트를 입었다. 떡볶이 단추라니, 그 단추 이름도 멋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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