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포도 다섯 알
크림슨 포도를 샀다. 초코파이 한 통을 살까, 포도 한 상자를 살까 한참 고민하다 그 포도를 샀다. 붉은빛이 도는 보랏빛 포도를 사들고 왠지 기분이 좋았다. 마트 진열대 앞에서 초코파이를 꾹 참아낸 내가 대견했다.
과자 값이나 과일 값이나, 그 값이 그 값인데 과일은 비싸고 과자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두고 보니 과자 가격으로 과일을 충분히 사 먹는다. 야식을 참는 지난 며칠간 나는 과자를 안 사들였다. 초코파이와 포도를 두고 포도를 선택하는 것처럼 간식으로 과일을 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과일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내가 과일을 사는 건 쉽지 않은 결정이다. 그러나 나는 진열대 앞에서 잠시의 치열한 고민으로 그 일을 해내곤 한다. 나는 간식의 질을 분명 높이고 있다. 야식을 참으면서 생긴 변화다. 그건 야식을 참으면서 먹는 것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하는 것에서 비롯되었다.
참고 안 먹으면서 야식에 대해 쓸 일이 없었는데 드디어 야식에 대해 할 말이 생겼다.
그 포도, 크림슨 포도, 붉은 보랏빛의 그 포도 알.
가족 중 과일을 챙겨 먹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탁자에 올려둬도 처음과 같은 모습으로 장식처럼 올려져 있는 것이 보통이다. 정물화 같다. 가족들에게 먹으라고 잔소리를 하다 하다 남은 포도를 손으로 뚝뚝 뜯어 아들 입에 하나, 딸애 입에 하나, 그리고 내 입에 다섯 개를 넣고 오물오물 씹어 먹었다.
“엄마! 포도! 야식 안 되잖아.”
부지불식간에 엄마의 우악스러운 손에 의해 자신의 입에 강제로 물린 포도알에 놀란 복실이가 다급하게 외쳤다. 시간은 8시가 넘어가고 있었고 내 입에선 다섯 알의 포도가 짓눌리고 있었다.
나는 포도 다섯 알을 야식으로 먹었다. 복실이의 외침을 듣고 나서야 정신을 차린 나. 내 얼굴이 일그러지는 걸 복실이가 빤히 쳐다보았다. 지난번 밥 한 숟가락을 먹었을 때처럼 뱉을까 말까 고민하는 사이, 복실이가 얼른 내 반응을 알아채고 위로를 해줬다.
“엄마 괜찮아. 과일이잖아. 하나 정도는 괜찮아. ”
복실이는 입속에 한 알의 포도를 굴리면서 말했다. 자신이 하나를 먹은 것처럼, 나도 하나를 먹었을 거라 생각한 거다. 그런데 나는 하나가 아니다.
“엄마는 다섯 개 먹었단 말이야."
울상이 되며 찌그러지는 내 얼굴을 보고 복실이가 말했다.
“과일이잖아. 괜찮아. 과자도 아닌데 뭐. ”
나를 달래주는 딸아이의 다정스러운 말에 힘입어 나는 포도 다섯 알을 꼭꼭 씹어 단물까지 다 삼켰다.
달달함과 씁쓸함이 입안에 계속 남았다. 그래도 과자가 아니니까. 남은 과자를 처리한다고 마구 주워 먹었으면 어쩔 뻔했는가.
그래 남은 음식 처리, 그걸 업으로 삼는 주부의 본성이 또다시 발목을 잡은 날이었다. 버릴 것인가 먹을 것인가. 그렇다고 포도 다섯 알을 버려? 다음번에 나는 또 먹게 될까. 의식이 있다 하더라도 남은 음식을 버리는 건 좀 고민되는 일이다. 다음번에 과일이 남으면 골고루 나눠서 아이들 입에 넣어줘야지.
내 입에는 왜 다섯 개의 포도알이 들어갔을까. 나는 아직도 그것이 의문이다. 나는 포도를 안 좋아한다. 아니면 나의 무의식이 포도를 좋아하나?
<야식을 참아라, 딱 100일만>은 초등 딸아이 복실이와 함께하는 야식 참기 프로젝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