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공부의 참의미를 매일 묻는다.
나의 장점을 말하자면.. 제발 참자. 자화자찬 공주병의 끝판왕을 경험할 수 있다. 타인의 장점을 눈여겨보자. 특히 아이의 장점을 알아내는 능력은 엄마에게 필수다.
큰 아이들이 책을 읽을 적에는 아이의 관심사를 바로바로 알아채 관련 도서를 주문해주곤 했다. 둘째의 종이 접기가 그랬다.
아이는 종이접기를 좋아했다. 같이 접고 혼자서도 접고 어린이집에서부터 초등 저학년까지 줄기차게 접었다. 학교 벼룩시장에는 별을 접어가 팔았다. 초등 고학년이 되면서부터 어느 순간 종이접기를 그만두었지만 꼬마 동생들의 종이 접기 도우미는 항상 둘째 아들이었다. 고맙다 아들아. 너의 노고와 능력에 박수를 보낸다. 넌 멋진 만들기 선수야.
첫째는 블럭 만들기를 잘했다. 물론 둘째는 덩달아 잘했다. 아이들 꼬마 때부터 레고블럭을 했다. 큰 아이들은 단품을 사주지 않았다. 크리에이터? 무더기로 들어 있는 블럭 뭉치를 사주고선 그림을 보고 때로는 동영상을 보고 만들었다. 큰 아이 둘 다 좋아하던 자동차 블럭만은 단품을 종류별로 사서 하루 이틀 가지고 놀다 분해가 되면 또 다른 재료로 썼다. 그때 엄마와 함께 만든 레고 작품들은 예전 사진 속 어딘가에 남아있을까?
아이들 6~7세 무렵이었을까? 유치원 다니던 때 가장 많이 블럭을 했으니... 블럭 책은 요 책 하나다.
집에 있는 블럭 부품을 하나씩 찾아 나열한 다음 자동차를 만들었다. 불자동차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다 만들고 난 불자동차는 빨강이 아닌 알록달록이기는 했다.
유년 시절 부모와 함께한 놀이는 분명 아이에게 즐거운 추억이자 놀라운 발전 동력이 된다. 다만 아이들이 계속 태어나는 바람에 실내 생활을 주로 했다는 것이 문제일 뿐이다. 아들들아 미안하다. 그래서 우리가 허약이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모두 엄마 탓이다.
아이가 관심을 가지는 분야를 키워주는 것이 엄마 리더의 역할이다. 어린 시절 그렇게도 열을 올리더니 지금은 방목 수준이라 좀 미안하다. 꼬마 둘은 스스로 알아서 크니 미안한 마음이 더 크다.
지금은 생각한다. 사실은 현실과 타협일지도 모르겠다. 아이의 재능은 아이 스스로 찾아야 한다. 엄마 리더의 역할과는 상관없이 아이의 재능은 나타나게 되어 있다. 엄마의 노력의 산물이 아닐지도 모른다. 다만 도와주고 지지해 주면 더 빛난다.
요즘은 아이들이 보는 유튜브 채널로 그들의 관심사를 파악한다. 엄마가 살금살금 다가가면 은근슬쩍 핸드폰을 가슴 쪽으로 돌린다. 공유하기 싫다는 것이다. 게임 채널만 본다며 잔소리를 들을 것이 뻔하니 미리 방지하는 것이다. 스스로 시간을 조절해 보라고 한 마디 던지는 게 전부다. 부글거리며 속을 끓여봤자 내 건강만 안 좋아진다.
셋째는 열심히 논다. 넷째는 뭐든 열심히 하다 안되면 소리를 지른다. 아이들은 스스로의 삶을 치열하게 살아가며 스스로 관심사를 찾는다. 그러다 꾸준히 하는 것이 그 아이의 재능이 된다. 그래서 하기 싫다는 것은 시키지 않고 하고 싶다는 것을 꾸준히 시킨다. 학원 선택과 공부 선택의 기준도 그렇게 잡았다.
우리 집 아이들은 다 똑똑하다. 엄마는 내 아이가 모두 천재인 줄 안다. 나도 그렇다. 중학교 가서 성적을 받아봐야 현실을 직시한다. ‘아! 우리 아이가 천재가 아니었구나.’ 그러면 엄마는 이렇게 새로운 포장지를 만든다. ‘아이는 공부를 안 해서 성적이 안 나왔을 뿐이야. 머리가 안 좋은 게 아니야.’ 사실 공부에서 머리가 차지하는 부분이 얼마나 될까. 노력이 전부인 세계에서 말이다. 내 아이는 똑똑하지만 성적이 안 나온다는 말은 노력을 안 한다는 말이다. 공부를 안 하면 성적이 안 나온다. ‘이제 공부를 조금 시켜볼까?’ 생각한다면 이미 늦었다. 공부도 습관이다. 공부는 엉덩이로 한다는 말이 그냥 나왔겠는가.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을 부러 늘리며 어릴 때부터 공부 습관을 키우는 것이 그런 이유일 것이다. 그럼 이제 습관을 키워볼까? 절대 아니다. 공부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니 아이의 관심이 가는 분야를 공부해야 한다. 공부 방법에 관하여도 앉아서 하는 공부도 있고 뛰어다니면서 하는 공부, 멍 때리며 하는 공부도 있다. 다양한 공부 방법을 무시하는 처사는 나 같은 엄마가 흔히 저지르는 오류다. 배울 것, 공부 방법, 습관 기르기 모두 아이의 몫이다. 자신의 마음이 반응해야 시작할 수 있다. 그러니 맡길 밖에. 아이에게 잔소리 몇 스푼 첨가가 엄마의 미덕이다. 소리가 고성이 오가지 않도록 주의하자.
똑똑한 셋째가 좋아하는 수학. 그래서 방학 동안 풀 문제집을 몇 권 주문했다. 아이가 어떤 문제집을 좋아할지 몰라서 세 권 주문했다. 아이는 4학년 과정 중 소수의 사칙 연산을 알아보고 싶다고 하였다. 3학년, 4학년 문제집과 천재일지도 모르는 우리 아이를 위해 수학경시 문제집도 시켰다. 입맛에 맞게 풀어 보라고. 아이는 문제 풀이를 싫어했다. 집에서 문제집이란 것을 심지어 3학년 겨울 방학에 처음 풀어봤다. 수학책도 재미나게 술술 읽는 아이가 문제 풀이는 경기를 했다. 문제집을 죄다 구석에 치워버렸다. 아이가 싫다는데 굳이 수학의 재미를 정규화된 문제 풀이로 막아야 하나 싶었다. ‘문제 풀이만이 공부가 아니다.’라고 생각하며 나 혼자 자기 합리화를 한 것일까?
사람마다 가진 재능이 다르다. 재능을 표현하는 방법도 다르다. 재능을 기르는 방법도 다르다. 그러니 획일화된 교육에 내 아이가 맞지 않는다고 기죽지 말자. 사실 우리 아이는 학교 공부도 꽤 잘한다. 엄마는 늘 ‘고슴도치 사랑’이라는 착각 속에 살기는 한다.
공부의 정의를 나는 매일 되묻는다.
공부란 무엇인가.
내 아이는 똑똑하다.
똑똑하다.
엄마의 잘못된 믿음이 아이를 망칠 수도 있다.
엄마의 믿음이 아이를 빛나게 키울 수도 있다.
그러나
크는 건 아이의 몫이다.
내가 성장하는 것도 내 몫이다.
다만
우리의 성장을 옆에서 보고 배우며
지지해 줄 수 있는 것,
그것이 가족의 참모습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