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둘이 오붓하게

by 눈항아리

아버지를 만나러 간다. 점심 나절부터 전화를 했지만 받지 않았다. 전화에 얽매어 있지 않은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 아버지는 부재중 전화가 와도 전화를 하는 법이 없다. 딸이 보고 싶다고 전화를 하는 법도 없다. 전화가 울려도 소리가 안 들려 한참 있다 받기도 한다. 들에 나갈 땐 오토바이 주머니에 넣어둔다. 연락이 잘 될 리가 없다. 집 전화로 전화를 했다. 어릴 때부터 쓰던 전화번호인데, 잊을 수도 없는 전화번호인데, 수화기 너머로 젊은 여자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이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 “ 순간 아버지가 핸드폰을 안 받으면 어떻게 연락을 해야 하나 걱정이 되었다.


외출 준비를 한다. 천천히 나갈 준비를 했다. 모두 씻고 외출복을 갖춰 입고 나니 아버지와 통화가 되었다. 다행이었다. 아버지는 팥을 고르고 있다고 했다. 집에 팥을 다 널어놔서 자리가 없다고 했다. 그럼 씻고 얼른 나오시라 했다. 식사를 하러 나가자고 하니 귀찮다고 했다. 다음에 보자고 했다. 아버지와 딸이 만나는데 약속 잡기 힘들다. 그렇다고 오늘을 보내버리면 또 언제 시간이 날지 모른다. 언제 갈 여유가 생길지 알 수 없다. 그렇게 매번 미루고 시간과 상황이 엇갈리고 하다 특별한 날에만 보고 특별한 날조차도 못 보고 하게 되는 거다. 그럼 나 혼자만 잠깐 아빠 보러 간다니 마지못해 오라고 한다. 반기지 않는 것인지, 보기 싫은 것인지, 상황이 상황이라 그런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래도 오늘은 꼭 아버지 얼굴을 봐야 마음이 편할 것 같다. 나 편하자고 오지 말라는 아버지 집으로 출발했다.


부모 집에 가는 길이 멀다. 거리가 멀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마음먹고 도착하는데 걸리는 상황들이 늘 멀게만 느껴진다. 출발부터 마음이 착 가라앉는다. 출발 전 아버지가 좋아하는 족발을 미리 주문했다. 마트에 들러 먹기 편한 포도와 아버지가 좋아하는 견과류를 샀다.


익숙한 골목길에 주차를 하고 들어선 거실은 진짜 팥이 한가득이다. 올해는 모두 팥 농사가 잘 안 되었다고 한다. 콩농사도 망했다고 했다. 아버지의 팥은 그나마 수확량이 좀 되어 수매 전에 깨끗하게 고르고 있었다. 심심할 새가 없는 분이다. 식탁과 온 사방이 팥 천지다. 어머니가 집을 비운 사이 팥 난장판을 만들어 놓으셨다. 식탁을 덮은 비닐과 신문 한쪽을 걷어내고 아버지랑 둘이 오붓하게 앉아 저녁을 먹었다. 식후 믹스커피도 한 잔씩 마셨다.


그리고 피스타치오 봉지를 뜯어 식탁에 올려두었다. 견과류를 좋아하는 아버지는 은행이냐며 딱딱한 껍질을 벌려 알맹이를 까드신다. 피스타치오는 가끔 한 봉지 가지고 간다. 그건 나만의 아버지 인지능력 검사방법이다. 은행이냐고 물어보신 건 지난번에도 똑같다. 길쭉하게 못생긴 은행같이 생기기는 했다. 뒷봉에 붙어 있는 ‘피스타치오’ 한글 이름을 보여드렸다. 물끄러미 바라보시더니 다시 견과류 까먹기 바쁘시다. 피스타치오는 딱딱한 껍질을 손가락 힘을 이용해 벌려야 먹을 수 있는 알맹이를 꺼낼 수 있다. 알맹이는 연둣빛이 돈다. 아몬드 보다 무른 알맹이는 꽤 고소하다. 지난번 보다 속도가 느리기는 하지만 어려움 없이 껍질을 제거하고 열매를 획득하셨다. 고기를 많이 드셔 몇 개 까 드시고 봉지를 닫는다.


콩이야기, 팥이야기, 깨이야기를 했다. 어제 로터리를 쳤는데 비닐이 얼었다고 했다. 내년 감자 심을 밭 로터리를 미리 쳐놨다고 했다. 감자는 매년 계약재배를 하는데 내년에는 그냥 조금 심어 농협에 판다고 했다. 35박스를 심는다고 했다. 조금이 조금이 아니다. 밭을 많이 내놨다고 했다. 이제 농사를 많이 줄인다고 하니 맘이 조금 놓였다. 대통령 계엄과 탄핵, 한덕수 총리가 거론되었고 앞으로 펼쳐질 대한민국의 정치가 걱정스럽다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정치 이야기까지 나오면 할 말을 다 한 것이다.


묵묵히 앉아 나도 아버지도 팥을 골랐다. 눈이 어두워 아버지가 고른 팥은 엉망이다. 까만 것과 속이 빈 것을 다시 골랐다. 나도 지난해부터 작은 글씨가 안 보인다니 아버지가 그랬다. “늙는 거 금방이다. ” 젊은 딸에게 참 현실적인 말을 해 주신다. 내가 고른 팥을 돌아보니 그 팥이나 아버지의 팥이나 똑같다. 벌레가 있다고 자꾸 투정을 하니 빨리 집에 가란다. 아이들 밥은 안 주냐며 등을 떠민다. 오랜만에 헤어지기 전 아버지를 꼭 안아드렸다. 아버지가 내 품에 꼭 들어왔다. 아버지가 나보다 작다니. 대문 앞에 나와 손을 흔들어주시는 아버지를 뒤로 하고 집으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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