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하기 싫다.
설거지가 싫다.
주부의 탈을 쓰고 이런 생각하는 내가 싫다.
이런 나 정상인가?...
그렇다고 밥을 안 할 수도 없고
생때같은 내 새끼 밥을 굶길 수도 없고
어쩐다.
어쩌긴 밥을 해야지.
꾸역꾸역?
밥 하기 싫다. 주부라는 탈을 쓰고 밥을 하기 싫다니 주부를 때려치울 수도 없고 난감할 노릇이다. 어제도 오늘도 매일이 그렇다. 밥 하기 싫다고 도망갈 수도 없다. 이미 매인 신세.
밥보다 더 하기 싫은 건 설거지다. 쌓아두면 더 하기 싫어진다. 내가 쌓은 설거지는 그나마 낫다. 가족이 쌓아놓은 설거지는 정말 꼴 보기 싫다. 울긋불긋 단풍잎 색깔, 말라붙은 밥풀떼기, 집안의 온갖 컵은 다 불려 나오는 싱크대 위 잔치마당, 쓰레기와 음식물과 그릇이 어우러지는 환상적인 무대. 주방의 모습은 늘 예상을 뛰어넘어 주부에게 놀라움을 선사한다.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싫다. 어쩌면 애 넷 딸린 주부가 이다지도 철이 없고 책임감도 없는 것일까. 이렇게 사소한 것만 같은 밥 하나 해내지 못하고 굴복하고 마는 나, 대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런 생각을 하면 자꾸 작아지는 마음에 나는 깊고 어두운 심해에 가라앉은 미꾸라지가 된다. 심해에 미꾸라지가 살 리가 없지. 그저 진흙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고 싶다. 흙탕물을 튀기면서 꿈틀대는 내 꼬랑지를 보라. 내 꼴이 참 볼만하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면 공부하기 좋아하는 학생이 있던가? 개중에 공부를 좋아하는 학생이 있기는 하다. 일하기 싫어하는 직장인 나와보라. 가끔 손 안 들고 일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다. 밥 하기 싫어하는 주부가 다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나 정상인 것 같기도 하다. 밥 하기 싫어하고 설거지하기 싫어하는 나는 정상이 아닐까?
싫은 것을 꾸역꾸역 해야 하는 신세. 그게 주부라서 꼭 그런 것만은 아닌지도 모른다. 직분, 의무, 책임과 같은 것을 덮어쓰면 좋아하는 일도 하기 싫을 수가 있다.
밥 하기 싫었던 것이 어디 하루이틀 일이던가. 지난여름에도 그랬고 지난겨울에도 심지어 신혼 때도 나는 버겁고 힘들고 하기 싫었다. 맞다. 싫었다. 아주 조금 즐거운 적도 있기는 했다. 아주 가끔 밥을 하며 행복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건 가족들 입에 음식이 들어갈 때 이야기다. 밥 하며 뒤집어쓰는 음식 냄새, 반찬 하나에 산 같이 쌓이는 설거지, 거품, 기름때... 나열할 것이 하나 둘이 아니다. 혼을 쏟아 식사 준비를 하면 쏙 빠진 정신 때문에 식사를 즐길 여유가 없었던 것 같다.
방학날 점심에도 그랬다. 아이들 방학 맞이 삼겹살을 준비했다. 이런! 좁은 공간에서 삼겹살 파티라니! 나는 왜 남편이 삼겹살을 산다고 했을 때 적극적으로 말리지 못했을까. 아무리 환풍기를 계속 돌려도 튀는 기름과 냄새가 어딜 가지 않고 온몸에 붙었다. 맛있게 먹고 말라붙은 허연 기름을 닦아내며 다시는 삼겹살을 굽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다짐을 하면 뭐 하나 금방 잊는다. 맛나게 오물거리며 먹는 아이들의 입이 굳은 결심을 잊게 만든다. 아아들은 쑥쑥 크고 청소년 아들들 먹이려 사흘돌이로 고기반찬을 대령한다. 그러나 나는 풀만 먹고사는 초록 들판의 소이고 싶다. 음머~~~~
이런 주부 정상이다. 정상 맞다. 치매 아니고, 정신 분열 아니다. 역할과 책임에 과하게 몰입해 개인의 존재감을 확실히 정의하지 못하는 불안정한 영혼, 그것이 나라는 주부다. 나는 저 푸른 초원 위에서 풀을 뜯는 소가 아니다. 심해에 가라앉은 미꾸라지도, 진흙탕 속 꼼지락거리는 미꾸라지도 아니다.
나는 나다.
나는 밥 하기 싫은 주부다.
나는 정상이다.
조금 불안정해도 괜찮다.
밥 하기 싫어도 괜찮다.
하기 싫은 밥을 하며 살아야 하는 숙명을 스스로 선택한 자는 바로 나다. 내가 왜 그랬을까? 나도 몰랐다. 결혼과 동시에 주부가 되어 밥의 구렁텅이로 굴러 떨어질 줄 내가 알았나? 그러나 몰랐다고 해도 내가 선택한 결혼이고 내가 선택한 가정이지 않은가. 어쩌겠는가. 내가 낳은 네 명의 아이들이지 않은가. 배를 곯릴 수는 없지 않은가. 책임이란 그렇게 내 뒤를 따라다니고 나와 한 몸이 되어 붙어 다닌다.
신은 우리 가족에게 삼시 세끼를 먹어야 하는 위장을 주셨다. 길고 추운 겨울을 보내며 쿨쿨 겨울잠을 자는 곰이 부럽기만 하다. 그들은 추운 겨울날 긴 잠을 자며 밥은 건너뛰던데... 동화책 속 엄마 곰이 느긋한 이유가 다 있었다. 곰을 부러워해 봤자 내가 겨울잠을 자는 곰이 될 것도 아니니 미련 갖지 말자. 피할 수 없다.
나는 삼시 세끼를 창조해야 하는 사명을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났다.
피할 수 없다면 맞서라!
나의 밥 하기 투쟁! 어떻게 싸울 것인가. 싸우고 난 후 나는 무엇을 얻을 것인가? 싸운 뒤 장렬히 쓰러질 것인가? 밥에 나의 모든 정성과 혼을 불어넣어야 할까? 과연 밥에 나를 탈탈 털어 넣을 것인가? 나를 갈아 넣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