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는 일요일, 아이들을 남편에게 맡기고 출근했다. 가을의 청 담그기 작업이 끝난 날이다. 늦은 밤 축제와 같은 감동을 안고 집에 돌아왔다. 두 달여 고생한 팔이 잘 버텨주었고 다리도 꿋꿋했다.
마당에 들어서자 거실을 비추는 환한 불이 따뜻해 보였다. 집에서 누가 기다려 주는 건 참 기분 좋은 일이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니 신세계가 펼쳐졌다. 따끈한 공기와 끈적한 고기 냄새가 섞여 집안을 더욱 아 늑 하 게 만들어 주었다. 사람 사는 집 같다. 기름 설거지도 말끔하게 마친 남편의 노고를 칭찬해 주어야 마땅했다.
다섯 명의 가족은 각자의 게임기를 들고 게임을 하고 있었다. 그중 가장 건강한 세 명의 남자가 내 소파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묵직한 무게를 소파가 감당하고 있었다. 뭣이든 여백의 미가 중요한 것인데 누가 좀 내려오시지?
출근 전 위임한 빨래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소파는 빨래 없이 텅 비어있어야 했다. 그런데 임무를 완수한 세 명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나는 텅 빈 소파를 원한 것일까? 세 명의 장정이 앉으니 꽉 차 보였다. 소파가 무너지지 않을까? 푹 꺼져 내려앉은 소파를 보며 맘이 불편하였다. 그러나 소파 걱정이 아니라는 걸 금세 알게 되었다. 모두의 소파인데 소파가 내 것인 양 자리 욕심을 내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물건에 맘을 쏟으면 이렇게 불편한 마음이 생긴다.
‘비켜! 내 자리야! ’
이렇게 말할까?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된다. 셋의 틈 어디든 엉덩이를 비적비적 비비고 들어앉으면 된다. 게임 화면을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남자 셋 모두가 자리를 좁혀 앉다가 어느 순간 불편한 사람이 나가떨어질 거다. 그러나 피곤했던 나는 남자 셋에게 자리를 양보해 주었다. 그들이 내려오기 전에 방에 들어가 먼저 잠이 들었다.
아침의 소파는 훤했다. 이런 빈 소파를 나는 좋아하나 보다. 복이가 제일 먼저 일어나 흐느적거리며 방에서 나왔다. 긴 팔과 다리를 끌고 나와 소파에 털썩 앉아 멍을 때렸다. 밤에 꽉 차서 못 찍은 소파 사진을 찍어야 했다. 까치집을이고 눈을 게슴츠레 뜨고 느긋하게 앉아 아침의 멍상을 즐기는 아이에게 비키라고 하지는 못하고 사진을 찍었다. 복이는 자신은 절대 나오지 않게 해달라고 당부했다.
남자 셋 보다 남자 하나가 앉은 모습이 훨씬 낫다. 허술하게 멍 때리며 앉은 아이와 소파의 모습이 조화롭다. 어우러짐. 좁디좁은 삼 인용 소파에도 여백은 중요하다. 내 미적 감각이 뛰어나서 지난 밤에는 마음이 불편했나 보다.
* 멍상 : 국어사전에 없는 말입니다. 멍 때리며 명상하기의 의미로 사용하였습니다. 멍 때리는 상태라고 봐도 좋을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