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량의 박스 야채를 개봉한 날이었다. 야채를 씻고 데치고 다듬고 자르고 껍질을 벗기고 키친타월로 닦아냈다. 일머리 없는 나는 설거지를 많이 만드는 재주가 있다. 이것도 능력이다. 마지막으로 무수하게 꺼내 놓은 대형 그릇을 설거지할 차례였다. 장갑을 끼었다.
설거지 중에 뭔 일로 고무장갑을 벗기려고 했는지는 모르겠다. 고무장갑 가운데 손가락 끝을 잡고 힘껏 당겼다. 핑크 장갑은 안 벗겨지고, 오른손 중간 손가락이 ‘슈웅‘ 포물선을 그리며 멀리 날아갔다. 중간 손가락이 둘째 마디까지 달아나고 없었다. 다행이다, 내 손가락이 아니다. 장갑 안은 이미 흥건하게 들어간 물 때문에 칙칙했다. 순간 힘이 쭈욱 빠졌다. 그리고 배꼽도 빠질 뻔했다. 바닥을 굴러다니며 괴로워하는 나를 보고 복동이가 다가왔다.
”엄마 왜 그래? “
괴로운 와중에도 나는 오른손을 펴서 보여주었다. 복동이도 그걸 보고 배꼽 빠지게 웃었다. 복동이가 옆에서 자꾸 웃으니 더 웃겼다. 장시간 앉아서 밤샘 일하느라 안 그래도 힘을 다 뺐는데, 웃다 힘이 빠져 죽는 줄 알았다.
웃음이 안 멈췄다.
오른손은 구멍이 뻥 뚫렸으니 어쩔 수 없이 왼손만 고무장갑을 끼고 설거지를 마무리했다. 그날 이후로 집에는 고무장갑 오른손이 없었다. 손이 덜 시려서 그런가. 아니다 오른손엔 요리용 라텍스 장갑을 꼈다. 나는 장갑 부자다. 그런데 손목까지만 오는 라텍스 장갑은 설거지 한 번 하고 나면 물이 다 들어간다.
매일 설거지를 하려고 싱크대 앞에 서면 그제야 한 짝의 고무장갑이 눈에 들어왔다. ‘사야지.‘ 생각만 했다. 하지만 설거지를 끝내고 나면 고무장갑 생각은 희미해지고 집을 나서면 잊고야 말았다. 그러던 고무장갑이 가게 고무장갑을 끼면 다시 생각났다 또 잊기를 반복했다.
어제는 일이 끝나고 마트에 꼭 들렀다 가자 굳게 다짐했다. 그런데 또 잊을 게 뻔하지 않은가. 나도 이제 나를 안다. 그래서 생각난 김에 얼른 쿠팡으로 달려갔다. 6개 묶음으로 주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