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술에 대한 분명한 목표와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 나이 들어 호호 할머니가 되어도 술 한 잔 기분 좋게 기울일 수 있는 것! 그게 나의 목표다.
요즘 내 주량은 맥주 한 캔. 억지로 한 캔을 더 따도 반 캔을 더 넘기지 못한다. 주량이라고도 할 수 없는 양을 그래도 고수하는 이유는 다른 사람들이 술을 마시는 이유와 같다. 한 잔 술에 위안이 되고, 기쁨이 된다. 취하면 취하는 대로 좋다.
정말 억울하게도 나는 맥주 한 캔에 취한다. 스무 살, 소주로 시작하며 주당 소리까지 들었던 나인데. 25년 술 인생이 정말 억울하다. 내 주량은 결혼 후 네 아이를 연달아 줄줄이 출산하며 임신과 출산, 수유의 과정을 거치며 쪼그라들었다. 출산 후 그 오랜 세월 못 먹은 술이 억울해 다시 홀짝홀짝 맥주 한 캔의 술을 시작한 것이 2~3년 전이다.
남편은 술을 안 마신다. 집이 시골이고 아이들은 어리다. 언제든 비상 상황에 대비할 수 있어야 하므로 나는 모든 가족이 집에 있는 밤이 되어서야 한 캔 맥주를 마실 수 있다.
이런 상황이 마련이 된다 해도 건강이 허락해주지 않는다면 먹을 수 없다. 부정맥이 있는 나는 한 잔 술 음주조차 치명적일 때가 많다. 그러니 컨디션이 정말 좋고 심박수가 계속 안정정이며 온갖 스트레스란 스트레스는 멀리 사라졌을 때, 기막힌 날, 축하의 의미로 어느 날 가끔 마셔주는 것이 한 캔 맥주다.
오랜 시간 금주를 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한 잔 술이 얼마나 고픈가를. 주변에 한 잔 술 고픈 사람의 마음을 알아주는 이가 없다.
어느 날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학교에서 설문지를 가지고 왔다. 매년 학기 초에 나오는 설문지인데 초등 학부모님들이라면 누구나 해봤으리라 생각된다. 질문에 이런 문항이 있다. ‘주변에 술을 마셔서 걱정되는 사람이 있나요?’ 이런 물음이었던 것 같다. ‘주변에 술을 자주 마시는 가족이 있나요? ’였던가? 아무튼 아이들은 끄덕이며 ‘네’라고 답한다. 한 캔 맥주도 술이란 말인가!
가족들은 주로 금요일밤, 나에게 맥주 한 캔과 안주를 선사하고선 자신들의 단체 게임을 즐긴다. 한 동안 파랑 캔음료를 같이 들고 와 건배를 해주던 남편도 없다. 이제는 안주를 만들어주고 게임을 하든, 방에 잠을 자러 들어가든 사라진다. 그저 나 혼자 맥주 한 캔에 기분이 좋아 책도 펴 놓고 안주도 펴 놓고 좋다고 앉아서 홀짝인다. 너무 좋다. 서러워야 하는 건가? 아니다. 나는 홀로 마셔도 좋다. 혼술인들 어떠하랴. 어언 10년을 넘게 참은 술이지 않던가.
그리하여 결혼 후 생맥주를 처음 마시던 날, 생맥주 500을 받아 든 치킨집에서 나는 인증사진을 안 찍을 수 없었다. (지난해 1월 말이었다. 그땐 하나 있던 직원이 그만두는 날이었다. 그 후로 남편과 둘이서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나는 가끔 맥주 500밀리리터 정도는 마실 수 있다. 가끔은 잠이 와서 못 마신다. 가끔 다음날 숙취가 있다. 가끔 배가 아프고 속이 쓰리다.
허약해져 버린 몸과 위장으로 그래도 꿋꿋하게 맥주 한 캔을 고수하던 나에게 며칠 전 커다란 복통이 찾아왔다. 그건 분명한 술병이었다. 아침부터 배를 감싸 쥐고 골골거렸다. 남편은 웃는다. 맥주 한 캔을 마시고 술병이라니 많이 억울하겠단다. 남편이 그러니 더 억울했다. 어떻게 주당의 경지에 올랐던 내가! 캔 맥 하나에 술병이 난단 말인가! 그러면서도 남편은 위로차 저녁으로 먹은 매운 치킨이 속에 부담이 되었던 것이 아닌가 하였다. 그러나 이미 한 캔에 KO판정을 받은 나는 쓰러졌다. 출근해서 바로 약국으로 달려가 겔포스를 사다 한 포를 뜯어 쭉 짜 먹었다. 10분 후 배가 한결 편안해졌다. 겔포스는 효과가 아주 좋다. 그런데 한참 있으니 배가 마구 아프다. 겔포스는 4시간 텀을 두고 복용하라고 해서 참다 참다 3시간을 넘기고 하나를 더 짜 먹었다. 그래도 배가 많이 아팠다. 점심시간, 복동이에게 전화가 왔다. 복동이가 엄마의 억울함을 풀어줬다.
엄마랑 같이 아파주는 우리 효자 아들은 나에게 죽 셔틀을 시킨다. 나보다 더 아프단다. 등하교 운전을 시킨다. (내가 자진해서 학교로 태우러 간다.) 녀석은 학원도 쭉 쉬고 종일 누워서 폰세상에서 맘 편히 쉰다. 엄마의 억울함을 풀어준 보상을 톡톡히 받고 있는 아들 녀석은 좋겠다. 아픈데 좋을 게 뭐란 말인가.
나는 한 캔 맥주를 지켜내어 다행이었다. 그거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