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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보나 May 19. 2024

당당한 불량주부 탈출을 결심하다.

라면이 쌓이던 어는날

1년 전 어느 날 독립을 외쳤었다. 그것은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속박으로부터의 독립이었다.


호기롭게 미션을 완수했다. 알맹이 없는 결과는 멋들어진다. 근거 없는 자신감에 가득 찼고 늘 긍정마인드가 샘솟았다. 매일의 긍정외침으로 나를 만들어갔다. 지속적으로 나를 위하는 일이 생기자 삶에 활력이 생겼다. 굴곡이 생길 때마다 회복탄력성이 강해졌음을 확인했다. 고무줄 같이 탱글탱글한 사람이 되었다. 참 멋진 날들이었다. 나에 대해 생각하는 것 만으로 벅찬 날들. 내 생에 이런 날들이 또 허락될까 싶게 고마운 날들이었다.


그러나 장단은 늘 함께하는 법이다. 나를 살리고 살림을 모두 내려놓았다. 스스로 떳떳해지고자 했던 나는 당당한 불량주부가 되어 있었다.


빨래산을 치우기 위해 아이들을 동원했다. 식사 준비의 부담을 줄이고 간편식으로 바꾸었다. 아이들 손에 개켜진 빨래는 둘둘 말려 제자리를 찾을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청소는 뒷전이 되었다. 안 그래도 치우기에 넉넉한 마음이 더욱 넓어져 바다와 같아졌다. 바닥에 구르는 쓰레기 더미도 별 감흥 없이 보아 넘길 수 있게 되었다.


글이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했다.


글은 중독이 심하다. 그것이 글 중독인지 핸드폰 중독인지 잘 가늠이 되지는 않는다.




며칠 장보기를 잊었다.


그런데 가게에도 집에도 냉동실에 자꾸 먹을 것이 채워졌다. 윙봉 갈비맛. 치킨 너겟, 만두, 동그랑땡.. 기본 야채를 챙겨놓는 것처럼 알차게도 쟁여 놓는다.


남편의 궁여지책이다. 마음을 다해 아내의 변화를 반기는 남편은 밥 안 하는 것에 대해 말을 않는다. 참고 있는 것일까? 속은 부글부글?


신나게 자판을 두드리는 아내에게 밥을 하라고는 못하고 마트에 다녀온다 둘러 말한다. 싱싱한 야채를 먹고 싶은데 마땅한 게 생각나지 않아 콩나물 하나만 사다 달라고 부탁했다. 저녁거리를 사 온 남편님 라면 묶음만 4개다. 며칠 전에도 그렇게 사 왔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콩나물 하나는 사 왔다. 라면에 콩나물을 넣어 먹어야 할까?


짜파게티는 며칠 전 사 왔는데 왜 또 사 왔소? 블랙이 새로 나와서 맛보려고 사 왔단다. 묶음으로 2개다. 우리는 6인 가족이니 한 묶음으로는 부족하다. 공화춘 짬뽕 한 묶음. 그리고 공화춘 짜장도 있다는 말씀은 집에 와서 한다. 그렇군. 다른 라면이었군. 집에 안 가져왔다고 불평이다. 야식으로 먹으려 했다는 그.


그는 진정 라면을 좋아한다.


나는 라면을 안 좋아한다. 라면을 먹으면 다음날 얼굴이 붓고 여드름이 올라오고 속이 안 좋다. 밀가루 음식이 체질상 맞질 않는다. 라면을 좋아하지 않으니 굳이 돈을 들여가며 장바구니를 채울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집에 라면이 없는 날이 많았는데... 어쩌다 종류별로 구비하게 된 것인지...


대신 나를 제외한 다섯 명의 가족은 모두 라면을 좋아한다. 그래서 아빠를 필두로 자신이 좋아하는 라면을 사기 위해 마트를 방문하면 필수품으로 고른다. 아빠를 마트에 보내면 안 된다. 큰 아이들도 마트에 보내면 안 된다. 장 보기는 엄마가 혼자 다녀와야 한다. 그래야 라면을 사지 않는다.


쌓여만 가는 라면, 종류가 늘어가는 라면을 보니 기가 막히다. 일곱 종류다. 심지어 즐겨 먹는 두 가지 라면은 빠져 있다.


둘째와 블랙 짜파게티를 저녁으로 먹으며 정다운 저녁시간. 여드름이 한가득 올라온 아이의 얼굴이 미안하다. 턱과 광대뼈 부근에 커다란 여드름이 많이 올라와서 아프단다. 평소에는 세수를 잘해라. 과일, 채소를 먹어라 잔소리를 해댔을 텐데. 라면 저녁을 먹이며 잔소리를 할 수가 없었다.


‘편의점 음식이랑, 튀김이랑, 라면 같은 거 먹으면 안 돼. 여드름 막 생긴다.’


말을 꾹 삼켰다. 엄마가 죄가 많다.


그래도 콩나물을 구비했으니 다행이다. 내일은 야채를 먹자.


그러나 다음날 저녁 메뉴는 맛을 못 본 공화춘 짬뽕이다. 이른 오후 시간부터 배가 고프다는 남편이 직접 택하였다. 나는 밥을 먹어야 하는데... 밥 할 생각은 않고 밥은 먹고 싶은 나의 선택은 라면에 밥 말아먹기.


저 라면을 모두 안 보이는 곳에 박아버려야겠다.


쌓여있는 라면을 보며 불량 주부에서 탈출하기로 굳게 마음먹었다.


그래 결심했어! 탈출하는 거야!





아직 맛을 못 본 뜯지 않은 묶음이 하나 더 남았다.

공화춘 짜짱.

짜장과 짬뽕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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