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책보나 May 26. 2024

운명은 나에게 행복한 밥을 하라고 하네

라면 글을  썼더니 관심을 보이는 남편.  평소에는 글씨가 수면제라며 녹음을 좀 해서 틀어줄 수 없냐고 하던 그다. 요즘은 오디오북을 들어보는 것 같은데 자신이 애정하는 라면 글이라서 읽어 보았나 보다.


이전 화의 요점은 라면을 그만 사자는 것. 남편의 입장에서는 아내가 ’스파게티!‘ 를 외치다 한 입도 못 먹은 게 마음에 걸렸나 보다. 외식할 때 복실이의 복스러운 먹성이 또 생각났나 보다. 빙그레 웃으며 할인이 끝나기 전에 얼른 사 온단다.


그럼 이번이 마지막이야. 맛만 한번 보는 거야.




길 건너 마트에 간 남편은 이번에도 20리터 재활용 봉투로 라면을 담아왔다. 정신없이 오후 시간을 보내느라 저녁밥시간이 훌쩍 지나고 있었다.  이번에는 단출하게 라면 2 묶음이다. 과자 2 묶음과 함께 봉투는 여전히 한가득이다.


왜 라면이 2개야?

스파게티 라면 할인 끝이래.

그럼 다른 하나는 무슨 라면?

그건 할인하길래. 이건 잡채 라면?

라면이 아니고 당면. 잡채가 먹고 싶은가 보다. 잡채는 항상 망하는데...


애들은 스파게티 라면
나는 짜장 라면!
남편이 주문하는 저녁 라면
꼬마 둘은 또다시 스파게티 라면
아빠는 짜장 라면
엄마는 스파게티 라면
어른은 두 개씩 먹는 라면   
배가 부르면
이제는 그만 먹고 싶을까?



2개나 먹은 스파게티 면은 생각 보다 배가 불렀고 포만감 때문에 제대로 맛을 음미할 수 없었다. 한 개가 적당한 것이었나 보다. 그렇게 스파게티 라면의 시대는 갔다.


지난주 짜장 라면을 잊은 건 아니냐는 마지막 문장을 눈여겨본 남편은 아직도 스파게티 라면 맛을 못 봤다. 다음번에 또 사러 가는 건 아니겠지? 제시간에 밥을 주지 않으면 또 모른다. “나 마트 갔다 올게.” 하며 당당하게 나가 마트에서 파는 도시락, 냉동식품, 라면을 잔뜩 담아 올지도.





죽는 날까지 밥의 굴레에서는 벗어날 수 없는 것인가!  세탁기와 같이 획기적인 기계가 음식 분야에서도 얼른 나오면 좋겠다. 푸드 프린터라고 어디에서 나온 것을 본 것 같은데... 제 밥은 언제 해주시나요? 밥 나와라 뚝딱!!  시간까지 세팅해 넣고 내 책상 위로 자동 배달 되는 시스템으로 부탁드린다. 생각만 해도 편안하고 즐겁다.


간편식이라도 맛과 영양이 보장된다면 어찌 맡기지 않겠는가. 재료와 위생 문제까지 덤으로 챙길 수 있다면 내가 사겠소. 얼른 개발해 주시오.


강력한 한방! 음식 기계를 원하는 불량 주부의 바람은 간절하나 손에 넣기까지는 밥을 해야 할 운명이다.


운명은 나에게 잡채와 같은 정성 어린 음식을 내놓으라고 한다. 간편 잡채 라면을 사 온 남편의 간절한 바람인지도 모른다. 시금치, 양파, 당근, 버섯, 피망 등 갖가지 야채를 볶고, 밑간 해둔 고기를 또 볶아 넣고 계란 지단을 올리면 완성! 참 당면을 먼저 불려 놨어야지! 당면을 불려 삶는다는데 보고 또 보아도 직접 삶으면 달라지는 이상한 현상. 당면은 스파게티 면 보다 좋으나 아직 넘지 못한 산이다. 항상 면이 불어 터지거나 덜 익거나.


몇 번의 실패 후, 잡채를 좋아하는 남편을 위해 간단 잡채를 해준다며  오뚜기 잡채면 하나 끓여 약간의 야채를 첨가해 먹은 것이 기억에 남았었나 보다. 그게 옛날옛적 어느 날 일인지 까마득하다. 잡채를 좀 연습해야 할까.  


그러나 불량주부 연습은 미루고 미루며 패스





마트에 가서 생각하자며 출발!


우선은 야채 코너부터 휘 둘러본다. 야채 가격이 요동을 치기 때문에 가격이 저렴한 것부터 담는다. 냉장 코너를 돌며 만만한 것을 담는다. 고기 코너를 지나며 고기 세 팩을 담는다. 생선 코너를 돌며 고민한다. 들까 말까. 오징어도 물이 좋고 고등어도 물이 좋다. 살까 말까. 그냥 돌아 나왔다.


굳은 결심대로 냉동식품 코너는 그냥 지나쳤고 라면도 안 샀다. 칭찬한다.


냉장고가 가득이면 생각 없이 반찬을 하면 되니 편하다. 고기반찬은 양념과 야채를 그득 넣고 끓이고 몇 번 저어 주면 되니 아주 간편하다. 야채 손질이야 음식 쓰레기가 좀 나와서 그렇지 경력 주부손에서 순식간에 정리가 되어 썰려 나온다. 그렇게 며칠을 집밥을 해 먹었다. 비닐하우스에서 싱싱한 쌈채소를 뜯어다 먹으니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님께 전화가 왔다. 마트 왔는데 뭐 사다 줄까? 오징어랑 고등어가 좋은데. 내가 즐겨 가는 마트에 어머님도? 수산물 손질이 꺼려져 몇 번을 생각하다 지나쳐온 그 생선좌판 앞에서 어머님이 전화를 한 것이었다. 어쩔 것인가. 마음은 머뭇거리지만, 흔쾌히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네!”를 외쳤다. 어머님은 곧 생선을 배달해 주셨다.


잘 먹겠습니다. 어머님!




오징어와 고등어는 고기를 다 먹을 때까지 냉장고에 고이 모셔져 있다 고기가 다 떨어지자 내 손에 들어왔다.


먼저 고등어는 구이보다 조림이 수월하다 싶어 두 마리를 한 솥에 넣고 양념장에 자작하니 조렸다. 오랜만에 생선을 먹으니 너무 맛있다. 생선 좋아하는 어촌 태생 물을 만났다. 뼈를 바르는 현란한 솜씨를 가족들에게 선보이며 하얗고 빨간 고등어 살을 밥에 착착착 놔주었다. 생선물이 좋아 비린내도 없고 좋다. 앞으로는 **마트로 가서 생선 사야겠다.


오징어는 정말 정말 요리하기 싫은데 내가 정말 좋아하는 녀석이다. 남편이 원하던 잡채 대신이라 생각하고 랩을 뜯었다.


마음을 먹고 시작하니 일사천리다. 착 달라붙는 라텍스 장갑을 끼고 손질에 나섰다. 손질된 오징어도 많지만 이 오징어로 말하자면 무려 ‘산오징어’다. 진즉에 먹을 것을. ‘산오징어’ 이름을 달고 있는 죽은 지 오래된 오징어를 손질하니 괜히 미안했다. 더 싱싱할 때 먹을 것을.


먹물과 다리를 분리하고 몸통을 가르고 먹지 못하는 것과 먹을 것을 구분했다. 족히 30분을 오징어 네 마리와 사투를 벌인 끝에 잘게 채 썬 먹을 수 있는 오징어 재료를 준비할 수 있었다. 보통 두툼하게 썰어 볶는데 잡채 생각이 떠나지 않아서 그랬을까? 양파도 최대한 얇고 길게 썰었다. 양파와 양념을 먼저 볶아 수분을 충분히 날리고 오징어는 마지막에 살짝 넣고 볶았다. 마지막엔 깨 솔솔. 이러쿵저러쿵해서 점심으로 오징어 덮밥을 먹었다. 비벼먹고 남은 오징어를 싹싹 골라 먹었다.


정성이 들어간 음식은 맛있다. 내가 해도 맛있다. 그리고 나도 그 음식을 좋아한다. 치사한 운명이다. 나도 밥 얻어먹을 운명이었으면 참 좋았을 터인데.




라면 안 사기와 라면을 줄이기 위해 가족을 설득하고 있다. 일 대 일 면대면으로. 남편은 건강을 위해. 큰 아이는 맛있는 음식으로 설득한다. 둘째 복이는 라면을 가장 즐겨 먹는다. 학원 시간도 빠듯해서 간편하게 먹고 가는 경우가 많은데 이번 주에는 라면 대신 시리얼에 우유를 말아줬다. 그리고 늦은 저녁을 밥으로 먹었다. 그러면 안 먹을까. 새벽 야식을 알아서 끓여 먹는다. 라면을 숨기자.


밥을 하고 반찬을 미리 준비하자. 정성이 들어간 맛있는 음식을 만들자.


시간은 무한이다.


시간은 무한이지만 나는 4남매의 엄마이고, 커피숍 풀근무 노동자다. 어느 시간을 빼서 쓸까. 불량 주부는 고민한다. 시간이 적게 들어가는 정성 가득한 음식은 어디 없나?


내 시간을 먹고사는 사람들. 가족들도 나의 행복이 버무려진 시간을 먹고 싶을 것이다. 행복이 버무려진 음식을 먹기를 바랄 것이다. 나도 행복한 시간을 듬뿍 담아 행복 가득한 음식을 먹이고 싶다. 행복한 음식이란 주부에게도 가족에게도 모두 행복한 음식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한 시간을 쏟아부어야 함을 안다. 행복을 담기 위해 무얼 어떻게 해야 할까. 불량 주부의 고민은 계속된다.


그래서 불량 주부님
오늘 마트에 가서 뭘 사셨나?



이전 03화 님아 그 라면을 사지 마시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