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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추만 심고 싶었다

5월 18일

by 눈항아리

지난해에는 고추 다섯 줄을 심었다. 땡볕에 나가 고추 따다 쓰러지는 줄 알았다. 하루에 다 딸 수 없었다. 아침나절에 나갔다 들어오면 쓰러졌다. 다시는 나가고 싶지 않았다. 한여름에는 새벽의 태양도 뜨거웠다. 가을까지도 계속 더웠다. 그렇다고 4시, 5시에 나가 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늘 해가 중천에 떠서 밭에 나갔었다. 진짜 농부가 되기는 아직 멀었나 보다. 새벽 어스름에 논밭에 나가던 아버지는 진짜 농부였다.

몸 사리는 일요일 농부, 올해 고추는 먹을 것만 심기로 했다. 고추는 딱 두 줄만 심었다. 몇 해 고추 농사의 경험으로 우리 식구 먹을 양은 두 줄이면 충분할 것 같았다. 두 줄을 심으니 50구 2판을 사서 6개 남았다.


땅에 구멍을 파고 모종을 가져다 넣으면 끝난다. 심기 전에 할 일은 모두 생략하고 싶다. 그러나 과정 없는 결과는 없다.


고추를 심기 위해 일요일을 불태웠다.

아 파란 하늘이여,

흰 구름이여,

똥거름이여,

까만 장홧발이여,

깜장 양탄자와 같은 제초 매트여,

붉게 녹이 슨 디귿 자 쇠붙이여,

자를 대신하는 30센티미터 쇠막대기여,

둥글게 번쩍이는 스테인리스 무스링이여,

제초매트를 녹일 가스 토치여,

구멍으로 들어갈 늘씬한 호미여.


퇴비를 뿌려 잘 정돈된 밭은 준비되었다. 봄날에 흙과 똥과 엎치락뒤치락하며 농부 남편이 고생했다. 고추 심는 날은 호스를 깔고 제초매트를 깔고 고추를 심으면 그만이다.


지난해까지 점적 호스를 먼저 깔았다. 그리고 제초매트를 덮었다. 그리고 제초매트 구멍을 뚫었다. 깜빡하는 순간 점적호스에 구멍이 뻥 뚫렸다. 매년 점적호스를 깔고 제초매트를 깔면 그랬다.


올해는 제초매트를 대충 편 다음 구멍을 먼저 뚫었다. 남편이 머리를 썼다. 구멍 뚫린 제초매트는 고랑으로 밀어 두고 점적호스를 깐 후 제초매트를 다시 덮었다. 완벽하다. 조금만 머리를 굴리면 호스에 구멍이 안 뚫린다.

제초매트 구멍을 뚫는 데는 집에 보이는 온갖 도구를 가지고 나온다. 나의 것이 분명해 보이는 베이킹도구, 12센티미터 원형 무스링이 밭에 끌려 나왔다. 제초매트에 스테인리스 무스링을 놓는다. 무스링 안에 가스 토치로 불을 쏜다. 순식간에 구멍이 뻥하고 뚫린다. 나는 제초매트 동그라미 구워진 것을 따라다니며 주웠다. 일정한 간격을 유지해야 하니 쇠막대기 하나도 준비했다. 막대기 놓고 무스링 놓고 토치에 불 붙이기를 반복했다. 호스에 물이 잘 나오는지 확인하고 고랑에 젖혀두었던 제초매트를 다시 덮었다. 바람에 안 날아가게 꼼꼼히 핀을 박았다. 매년 고무망치를 휘둘렀는데 망치도 필요 없었다. 그냥 손으로 꾹 누르고 발로 꾹 누르고 했다.


고추 모종을 그 대단한 구멍에 심는 시간은 30분도 안 걸렸다. 다 심었다!


심을 때는 더웠다. 심고 나서 밤이 되니 13도로 떨어졌다. 고추는 15도 이하에서 냉해 피해를 입는다. 남편은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다. 가을이 되어 고춧대를 베어버릴 때까지 노상 걱정일 테다. 바람이 불어도 추워도 더워도 물이 말라도 걱정이다. 농부의 숙명인 걸 어쩌겠는가. 나는 눈곱만치도 걱정이 안 된다. 농부로서 자질이 참 많이 부족하다.


낮은 에어컨을 틀어야 할 정도로 덥고 밤은 보일러를 틀어야 할 정도로 춥다. 작물이 적응하기 참 힘든 날씨다. 모종에서부터 벌써 꽃을 달고 온 고추는 꽃을 활짝 피운 후 벌써 후드득 떨구었다. 그 작은 열매를 깡그리 따주기로 했다. 살기 힘든 환경이 되면 식물은 더 화려하게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데 힘을 쓰는 듯하다. 부디 지금은 자손 번식에 힘을 쓰지 말고 뿌리를 뻗는데 더욱 힘을 쓰기를 바란다. 땅딸막한 고추야 힘내라.

고추와 고추 사이, 고추와 감자 사이 고랑에도 제초매트를 깔았다. 폭 50센티미터 고랑용 제초매트다. 당분간 풀 걱정은 안 해도 된다. 심기만 하면 좋겠는데 계속할 일이 나온다. 고랑 제초매트까지 깔고 나니 파이프를 박으면 좋겠단다. 뭐든 간단하게 심기만 하면 좋겠다고요. 오늘은 이제 그만. 점심 전에 고추 심기를 마쳤다. 두 줄 심는데 하루 종일 걸리는 줄 알았다.


그렇다고 농촌의 봄날 막바지에 다다른 이 시점에 일이 없을 수가 없다. 일이 널리고 널렸다. 남편은 일이 너무 많아 의욕이 떨어진다고 했다. 일의 우선순위를 정해야 한다나? 1부터 10까지 정하지 말고 1부터 3까지만 정하고 나머지는 포기하라고 충고해 줬다. 과연 끝에 달려있는 7을 버릴 수 있을 것인가.


점심 먹고선 물먹은 퇴비를 날랐다. 석회고토 열몇 포, 펠릿형 퇴비 50포 그냥 퇴비 50포 정도다. 20킬로그램 퇴비는 물을 먹어 40킬로는 되는 것 같다고 했다. 남편은 퇴비를 날랐다.


그리고 나는 차를 타고 날랐다. 큰 아들의 교복을 찾으러 아이들 모두 태우고 시내로 날랐다. 시내를 돌아 돌아 집으로 돌아오니 남편이 참으로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남은 똥거름을 복이와 같이 셋이서 날랐다. 나는 물 먹은 거름을 들지는 못하고 두 개씩 외발 수레에 날랐다. 복이가 싣고 나는 나르고 남편은 쌓았다.


거름은 물을 먹지 않도록 잘 덮어놔야 한다. 통풍이 안 되면 습이 찰 수 있으니 꽁꽁 싸매놓으면 또 안된다. 비는 피하되 통풍은 되도록 보관해야 한다. 많이 받지 말고 한 해 쓸 만큼만 사야 한다. 우리는 부숙이 잘 되라고 지난해 많이 받아놨더니 길로 똥물이 줄줄 흘러서 골머리를 앓았다. 집 앞에 있던 퇴비를 지붕이 있는 곳으로 안전하게 옮겼다. 큰 일 했다. 물청소까지 마치고 바위틈에 피어난 영산홍 주위에 잡초도 조금 잘라줬다.


절대 집에 먼저 들어가자고 안 하는 내 낭군님이 저물어지자 들어가자고 보챘다. 그러게 왜 똥거름을 그렇게 많이 한꺼번에 받아가지고. 5년 차 초보 농부는 이것저것 몸으로 배운다. 퇴비받는 장소는 고심해야 한다.


고추 두 줄 심은 게 다인데 남편은 녹초가 되었다. 지난번 파김치가 되었던 나보다 조금 많이 안쓰러워 보였다.


과정 없는 결과는 없다. 오늘의 노고가 내일 주렁주렁 열매로 맺힐 것이라 믿는다. 단 날씨가 도와줘야 한다. 사는 것도 농사도 참 만만찮다.

아름다운 농촌의 봄날이 지나가고 있다. 이번 일요일에는 호박, 오이, 가지, 토마토, 수박 등을 심을 예정이다. 밭은 준비되어 있다. 딱 심기만 하면 참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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