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나절 책상을 뒤로하고 마당으로 나가는 현관문을 열었다. 남편은 이미 밭에 나간 지 한참 지났다. 나는 금방 아이들을 깨워야 하니 장화를 갈아 신지도 못했다. 밭까지 나갈 시간은 안 된다. 앞이 뻥 뚫린 슬리퍼를 질질 끌고 나의 정원으로 간다.
우리 집에 ‘나의 꽃’이라고 부를만한 것이 생겼다. 패랭이다. 그 꽃들에게 물을 주려고 한다. 장마 밑이라고는 하지만 내리지 않는 비만 기다리고 있다 화단의 꽃들이 다 말라죽을지도 모른다. 뿌리 나눔 해 옮겨 심은 패랭이 한 무더기는 누렇게 말라죽었다. 목마름과 더위에 꽃은 생장을 멈췄으나 이름 모르는 잡풀들은 왕성하게 자라고 있다.
시골살이 5년 차 시골 아낙이지만 화단에 물 한 번 주체적으로 줘 본 적이 없는 나. 마당의 농사용 지하수를 사용할 줄 모른다. 남편은 지하수 솟아오르는 수도꼭지에 긴 호스를 여러 개 달아서 사용한다. 그리고 때때로 바꿔서 사용한다. 지난 주말 남편에게 물 주는 방법을 물었다. 그냥 물을 틀면 된다고 했다.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수도 가까이 가자 지하수를 끌어오는 전기 모터 돌아가는 소리가 윙윙 거리며 들려왔다. 그런데 어느 호스의 어느 꼭지를 돌려야 물이 나올지 난감하다. 주황색 레버를 내려야 하나? 올려야 하나? 복실이가 쓰던 작은 물조리개가 보이는데 그냥 그것을 이용할까? 용감하게 수도꼭지를 돌렸다. 거대한 물줄기가 대포처럼 쏘아져 나온다. 남편이 밭에서 일하다 다다다 달려온다. 그 호스로 화단에 물을 주면 식물이 다 죽는단다. 분수로 뿜어져 나오는 호스는 비닐하우스 모종 물 주는데 연결해 뒀단다. 그것을 끌고 나오려니 꽃밭까지 길이가 한참 모자란다. 하는 수 없이 대포 물호스를 질질 끌고 화단으로 간다. 꽃보다 풀이 더 많은 화단이다.
수압이 세게 나오는 데는 이유가 있다. 물호스 분사기가 고장 났기 때문이다. 남편은 헤드를 돌려보더니 조금 퍼지는 물줄기로 바꿔주고 떠났다. 분수는 아니지만 수압은 조금 약해졌고 바닥으로 굵은 물줄기가 질질 흐른다. 물을 뿜으며 지하수 퍼올리는 기계는 연신 울음소리를 낸다. 물을 주니 흙이 파인다. 꽃이 아프겠다. 튼튼한 풀 사이에 간신히 살아가고 있는 가녀린 코스모스 줄기가 꺾이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래도 물을 주니 아침 이슬 머금은 듯 햇살에 반짝이는 물기 어린 초록잎에 생기가 도는 것 같았다. 꽃 말고 초록 풀이 덩달아 생생해졌다.
나의 의지가 화단에 뿌린 첫 물방울이었다.
풀에게 밀리는 나약한 인간, 너저분한 마당 생활, 귀신같이 키를 키우는 풀들, 화단이 아닌 풀밭을 끼고 사는 귀신같은 우리 집. 시골 생활을 하며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으나 늘 불만이 입 안에서 맴돌았다. 그런데 나는 과연 더 나은 생활을 위해 무슨 노력을 했던가. 남편 혼자 노력하며 떠먹여 주는 것에 익숙해져 나는 그저 책상머리에 앉아 되지도 않는 글이나 쓰고 책이나 읽어대면서 잘난 체를 했다.
떠밀리듯 밭에 나가 일요일 서너 시간 일을 하고 나면 하늘에 닿고 땅끝에 닿을 것 같은 한숨을 쉬며 불평불만을 늘어놓았다. 나의 삶이 더 나아지도록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집안에 앉아 예쁜 초록 나무 흔들리는 것만 보고 싶었던, 나는 그런 얌체짓을 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
남편은 비닐하우스에 심은 상추조차 거들떠보지 않는 아내를 위해 집 앞으로 기다란 입식 상추화분을 옮겼다. 그 상추에 물을 주기 위해(내가 안 줄 것이 뻔하므로) 또 호스를 연결해 밤이면 퇴근 후에도 창고, 비닐하우스의 모종에 물을 주고 마지막으로 집 앞 상추, 딸기, 총각무, 부추에게 물을 주고서 들어온다. 그건 그저 남편의 즐거움일 수도 있겠으나 내가 더욱 가까운 곳에서 시골살이의 즐거움을 맛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배려는 아니었을까.
오늘 아침 현관문을 열고 나가 나는 현재는 풀밭이라 불러도 무방한 나의 화단에 물을 주었다. 양손 가위를 들고 가 주위의 풀을 깎았다.
꽃밭을 가꾸듯 나의 삶을 가꾸겠다. 꽃밭은 작다. 나의 삶은 크다. 작은 꽃밭이든 거대한 나의 삶이든 가꾸는 게 쉽지는 않아 보인다. 그러나 나는 오늘 첫 발을 뗐다.
나는 삶을 가꾸는 사람이 되기로 했다. 그리고 삶을 가꾸듯 꽃밭을 가꾸기로 했다. 지금은 비록 풀밭처럼 보이지만 천천히 정성들여 가꾸어가겠다. 왠지 꽃밭을 가꾸면 더불어 삶이 가꾸어 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