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은 제 그릇의 크기를 안다
식물은 화분의 크기만큼 자란다. 제 그릇을 아는 것이다. 크게 키우려면 큰 화분에 심으면 된다.
5월 말, 아이들과 모종판에 바질 씨앗을 뿌렸다. 모종판의 반은 크기가 큰 화분으로 옮겨 심었다. 그중 두 개는 더 큰 화분으로 이사를 했다. 모종판에 남겨진 바질은 좁은 공간에서 끈질기게 살아갔다. 화분의 크기에 따라 바질의 크기 차이가 얼마인지! 어른들이 왜 큰 물에 가서 놀라고 했는지 화분의 크기를 보고 단번에 이해했다.
좁은 모종판에서 50여 일을 지낸 바질은 아직 살아있다. 게으른 주인을 만나 미처 큰 화분으로 이사를 못한 불쌍한 녀석들이다. 반질반질 초록잎이던 바질은 양분 없는 비좁은 흙에 뿌리를 가득 채우고 겨우 연명하며 삶을 이어가고 있다. 보다 못한 남편이 안쓰러워 땡볕에 마당에 나가 누렇게 뜬 바질을 몇 개 화단에 심었다. 심으면 그냥 심겠는가 땅을 점령하고 있던 강아지풀, 쑥 같은 초록 잎을 모조리 뽑아버리고 심었다. 남편은 검색창의 말을 잘 듣는다. 바질을 심을 때 간격을 30센티미터 지키랬다고 화단에 띄엄띄엄 바질 몇 개만 심었다. 남은 건 다시 제자리로 가지고 왔다. 아직도 남은 바질...
“그냥 화단에 다 심지 그랬어. 화분보다는 넓은데. 남은 건 어떡할 거야.”
“자기는 씨만 뿌려놓으면 다야! 물 한 번을 줘 봤어?”
반성한다. 씨앗을 뿌린 그날 이후로 나는 그저 가끔 얼굴만 비추고 가끔 자라 있는 모습만 보았다. 매일 물 주고 키우는 건 남편이었다. 씨만 뿌리면 그냥 저절로 크는 줄 알았지, 바질이 그렇게 쑥쑥 클지 알았나 뭐.
“어떡할 거야. 대체 어디에 심을 거야?”
날이 더운데 저 아이들이 밖에 심으면 살 수 있을까? 폭우처럼 쏟아지는 태양이 걱정이다. 여린 잎 바질이 견딜 수 있을는지... 나는 왜 씨를 뿌린 것일까. 나는 꽃밭을 만들고 싶었을 뿐인데, 잎을 따먹는 바질은 왜 그렇게 많이 심었을까.
“내가 아침에 일찍 일어나면 심을게. 집으로 다 가지고 가자.”
다시 트럭을 타고 집으로 간 바질 모종. 나는 과연 어디에 심었을까? 심기는 무슨 그런 날은 일찍 못 일어난다. 안 일어난다. 피하고 미루고 그러다 어찌어찌 되겠지 한다. 계획이라고는 전혀 없는 허술한 인사 같으니.
“여보, 일요일까지만 살려주면 안 될까? 내가 일요일 심을게. “
겨우 일요일로 나흘을 미뤘다. 남편은 거실 창문 밖에 바질 화분을 쪼르르 세워놓고 분사형 물줄기를 뿌려주고 출근 차에 올랐다.
가게 옆 작은 마당, 부직포 화분 옆에 선 두 개의 큰 화분 바질은 이제 고추와 키를 겨룰 만큼 커졌다. 고추 화분 옆에서 한여름의 태양빛을 당당하게 홀로 견딘다.
큰 화분 속 바질을 보니 비좁은 틀 속에서 힘결게 사는 어린 바질, 앞날이 불투명한 그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미리 좀 옮겨줄걸, 그랬으면 많이 컸을 텐데.
하지만 모른다. 비좁은 모종판에서 영양 없이 커 비실거리던 바질이 넓은 땅을 만나면 금세 큰 화분 바질보다 더 몸집이 커질지도 모른다. 큰 화분 속 바질이 어느 날 물을 못 먹어 빠싹 말라 타 죽을 수도 있다. 화단에 심은 바질 또한 목마름을 호소하다 고꾸라질 수도 있겠군.
끝까지 가봐야 안다. 먼저 큰 그릇을 차지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먼저 넓은 세상으로 나갈 궁리만 할 것이 아니다. 먼저 넓은 세상으로 나간 것은 큰 화분 속 바질일까, 좁은 모종판에 남았던 바질일까.
누가 먼저인지, 어느 화분이 더 큰 것인지 중요할까. 끝까지 뭘 가보자는 건지. 저희들은 신경도 안 쓰는데, 왜 상관도 없는 나는 바질들을 줄줄이 세워놓고 저울질을 하고 있는가. 남은 화분 속 아이들을 빨리 구출해 땅에 심어줄 생각은 않고.
남아있는 작은 바질을 일요일엔 꼭 옮겨 심을 테다.
집엔 일도 많은데 나는 왜 씨앗을 뿌렸을까.
씨앗을 뿌리면 그냥 꽃이 피는 줄만 알았지.
그런데 바질은 꽃이 피는 거겠지?
잎만 뜯어먹는 게 아니겠지?
그런데 언제 뜯어먹을 수 있는 걸까.
인터넷에 수북하게 킬로그램 단위로 팔던데, 아주 싸던데, 나는 왜 씨앗을 뿌린 걸까.
식물도 아는 자신의 그릇 크기를 나는 모른다.
왜 대책 없이 사는 건지, 쯧.
감당할 수 있는 일만 벌이자.
50여 일을 모종판에서 산 바질은 살려달라고 아우성이다. 그 소리를 못 듣는 사람, 귀 닫고 눈 감고 사는 사람이 여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