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부 방학 증후군

by 눈항아리

슬기로운 방학 생활을 하기로 다짐하고 있었지요.


방학을 맞이하는 주부의 자세.

덤덤하게 무심하게 받아들이기.

시간 맞춰 밥 대령하기

시간 맞춰 학원까지 데려다 주기? 이제는 알아서 좀 가시길.

잔소리 삼키기.

잔소리를 삼키다 사레가 들려 남기는 말씀.


내 아이 네 아이 사춘기 어린이들에게

복동아 공부를 열심히 하지 말아라.복동아 왜 집에만 오면 붙박이로 책상에 앉아 있는 거냐. 고등학생이 되더니 책상이 그리도 좋으냐? 게임 채널이 그리도 재밌냐! 게임도 책상에 붙어서 하는 거냐? 멋지다 아들! 게임 공부도 공부라고 말하고 싶으냐!

달복아 운동을 좀 해라. 이런 소리 정말 안 하고 싶었는데 운동을 안 하니 허약이 가 되는 거란다. 비실 거리며 머리를 굴리고 입만 움직이지 말고 머리만 굴리지 말고 운동할 생각을 좀 하거라. 달복아. 걷고 뛰지 않아 아기처럼 부들부들한 네 발바닥을 보면 걱정이 앞선다. 코 밑 수염이 거뭇해지면서 발바닥이 보송보송하면 어쩌자는 얘기냐.

복아 운동을 작작해라. 이런 소리 정말 안 하고 싶었는데 운동만큼 중요한 것이 먹는 거란다. 새벽 3시 30분에 왜 턱걸이를 하는 거냐. 철봉 삐그덕 거리는 소리에 깨서 잠을 못 잤잖니. 복아 엄마도 잠 좀 자자.

잠 좀 자라 얘들아. 왜 밤잠을 안 자니. 한 시, 두 시, 세 시... 도대체 몇 시에 자는 거냐.

아침엔 좀 일어나자 얘들아. 엄마는 출근을 해야 한다. 그리고 피시방은 너희들의 출근지가 아니란다.

라면을 끊어라. 라면만 먹고사는 사람도 있다고? 라면을 안 끓여주니 이제는 스스로 잘도 끓여 먹는구나. 설거지로 잔소리를 해서 그런 거니? 컵라면을 매일 종류별로 바꿔서 먹더구나. 1일 1라면 타파!
......


네 명의 아이들이 모두 방학에 들어가며 설렁설렁 슬기로운 방학 생활을 위한 다짐, 아이들에게 당부, 잔소리 등은 쏙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나 스스로를 감당하기 힘든 시기가 다시 찾아왔습니다.


아들 셋, 딸 하나. 초중고를 넘나드는 사춘기 어린이 네 명의 방학이 어제 드디어 완성되었습니다.


종일 혹사한 팔이 후들거리고, 온몸에 힘이 쭉 빠지고, 대책 마련을 고심하며, 안절부절못하기도 하고, 정신이 아득해지고, 열불이 오르락내리락하기도 하는 제가 주부 방학 증후군이라 이름 붙인 병이 어제 다시 도졌습니다. 또다시 닥쳐온 방학이라는 현실이 감당해야 할 무게로 나를 짓누르는 날이었습니다.

​그러나 손 놓고 있을 수 없지요. 삼시 세끼 먹고살아야 하니까요. 몸이 부서져라 설거지를 하고 닥치는 대로 설거지를 하고 너덜거리는 팔을 휘적휘적하며 집으로 돌아와 감기는 눈을 부릅뜨고 옷 정리를 마치고, 또 마무리 설거지를 하고 청소기까지 모두 손수 돌린 후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방학이 되면 저는 삼시 세끼라는 현실을 마주하게 됩니다. 이상을 좇아 하늘을 오르다 현실 세계로 추락한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방학이란 현실을 요리조리 피해 살아가는 저를 다시 현실이라는 세계로 불러들이는 요술방망이, 소환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의 세계는 지금 여기 있습니다. 피하지 않고 투정 부리지 않고 헤쳐나가겠습니다.

​나는 해낼 것입니다. 방학 때마다 늘 그랬습니다. 우리가 못 해낸 적이 있습니까? 모두 해낼 것을 압니다. 오늘도 한 걸음, 또 한 걸음 바삐 움직여 보겠습니다.


‘밥’이라는 현실 앞에서 무너지지 않기 위해, ‘먹을 것’이라는 사소한 것에 무릎 꿇지 않기 위해, 무한 재생산되는 설거지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 나는 오늘도 나를 붙잡아야 합니다.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와 밥에게 납작 몸을 숙이고 겸손을 배우고 묵묵함을 배우는 시간입니다. 그 속에 나를 구하기 위해 빛나는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다시 돌아온 방학이라는 현실 앞에서 소매를 걷어 붙이고 수돗물을 콸콸 틀어놓고 기계처럼 손을 놀렸습니다. ​

모든 주부님들 파이팅입니다.


더욱 빛나는 나를 발견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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