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드는 책을 골라야 한다

그것이 만화책일지라도

by 눈항아리


그 서점에 처음 간 건 늦은 밤이었다. 10시가 가까워 오는 시간이었다. 우리는 늘 밤 9시 30분이 넘은 시간에 그 서점에 간다.


처음 서점에 방문했을 때 달복이는 <마법천자문 도감>을 샀다. 별로 책을 사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냥 동생 복실이가 고르니 달복이도 하나 집어 들었다. 안 고르면 뭔가 밑지는 기분이었다.


두 번째 방문했을 때, 달복이는 체스판이 눈에 들어왔다. 엄마는 안 된다고 했다. 체스 책을 사면 체스판을 사준다고 했다. 사장님 체스 책이 있나요? 그런 책이 없어서 주문을 했다. 일주일 후에 서점에 방문했다. 10시가 5분 남은 시간이었다. 멀리서 보니 서점 간판 불이 꺼져있었다. 셋이 손을 잡고 달렸다. 책방 주인이 막 문을 닫아걸고 있었다. 체스 책 찾으러 왔어요! 체스 책과 체스판을 들고 의기양양하게 집으로 돌아왔다. 그 후로 달복이는 책가방에 체스 책과 체스판을 넣고 다녔다. 책가방에 넣은 후 빼지 않은 것일 뿐인지도 몰랐다. 학교에서는 체스를 할 친구들이 없었다. 선생님도 장난감은 학교에서 꺼내면 안 된다고 했다. 공기알은 된다고 했다. 그래서 공기알 5개도 넣어 다녔다. 아이들과 우르르 모여 공기놀이를 했다. 그래도 체스 책과 체스판은 늘 가방에 넣어 다녔다. 한 번은 엄마가 가방을 들어보고 기겁을 했다. 15킬로그램인 큰형의 가방 무게와 비슷해진다는 것이었다. 엄마는 무게를 가늠하지 못하는 게 분명하다. 큰형의 가방이 바윗덩어리라면 달복이의 가방은 돌덩이 수준이다.


세 번째 방문, 달복이는 큐브가 사고 싶다고 했다. “큐브 책이 있나 찾아볼까? ”엄마가 말했다. 귀찮기만 했다. 큐브 책이 대체 있기나 할까? 그냥 엄마는 사주기 싫으니까 그러는 것 같았다. 달복이와 복실이는 만화책 코너를 돌았다. 달복이는 복실이에게 <마법천자문>을 고르라고 권했다. 신간이 나왔다며 복실이가 기뻐하며 얼른 책을 들어 옆구리에 끼웠다. 다음 권을 외치는 시리즈물의 함정에 걸려들었다. 달복이는 함정을 슬쩍 피하고 복실이가 걸려들었다. 달복이는 다시 고심했다. 골랐다! 이번에는 <전천당 도감>이다. 무슨 책일까, 대체. 이것 역시 만화다. 함정이었다! 전천당은 글 밥이 가득한 시리즈로 알고 있었는데 도감은 만화다. 달복이도 일부러 만화책을 산 건 아니다. 비닐을 벗겨보지 않고선 속을 알 수 없었다. 엄마는 여전히 속을 몰랐다.


달복이와 복실이는 책 한 권씩을 들고 신났다. 장난감을 산 것 마냥 신났다. 책방 구석 엉덩이만 겨우 들어가는 나무 의자에 나란히 앉아 따끈따끈한 책을 펼쳤다. 잠시 후 책방 주인이 문을 닫는다고 외쳤다. 달복이와 복실이는 선 자세로 책에 코를 박고 있다. 그 자세 그대로 천천히 문을 지나 보도블록 길을 걷는다. 2차선 도로를 건너며 겨우 책을 접었다. 읽던 곳을 놓치면 안 되니 손가락 하나를 끼워 잘 표시해 두었다. 차에 타자마자 다시 책에 코를 박았다. 책은 한 권씩 골랐지만 자신이 고른 책 보다 남의 책이 더 재미있게 보인다. 얼른 읽고 바꿔봐야 한다.


집에 도착해서 복실이가 <전천당 도감>을 보기 시작했다. 복실이는 처음 접하는 <전천당>이다. 재미있다고 엄마가 몇 번 읽기를 권했지만 한 번도 손이 가지 않았던 책인데. “엄마 얘네 쌍둥이야, 너무 귀엽지?” 하나도 안 귀여웠지만 뭐. 잠자는 방에서도 만화책 읽기는 계속되었다. 엄마가 먼저 누워 몇 번이나 불을 꺼달라고 요청하고 나서야 불이 꺼졌다. 아쉬운 밤이었다. 다 못 읽은 책은 아침 6시에 일어나 엄마 옆에서 읽었다. 엄마라는 사람은 옆에서 복실이가 책을 읽자 그제야 만화책이라는 걸 알아챘다. 아깝다, 아깝다. 속으로 노래를 불렀다. 평생 간직하고 싶은 책을 사야 하는 것 아닌가?


아침 출근길 아이들을 싣고 가게로 가는 길에도 복실이는 <전천당 도감>을 챙겼다. 손에 쏙 들어오는 책이 마음에도 쏙 들었다. 보고 또 보고 싶다고 했다. “도서관 들러서 <전천당> 책 빌릴까? ”엄마가 물었다. “응! ”아이들의 반응이 놀랍다. 가게가 아니라 도서관으로 바로 출근했다. 전천당 시리즈를 10권 빌렸다.

책 쌓아놓고 읽는 이상한 취미들/ 나도 고3때 수능이 끝나면 못 읽은 책 쌓아놓고 읽는 꿈을 꾸었다.

다 읽은 책이라 흥미가 없었던 달복이는 다시 읽고, 몇 번이나 권해도 안 읽겠다던 복실이는 <전천당 도감> 만화책 덕분에 흥미가 생겼다. 점심 먹는 시간까지 계속 쭉 책을 읽었다. 너무 재밌어서 세 발자국만 움직이면 되는 엄마의 심부름도 할 수 없었다.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안다. 인생 새옹지마라지 않던가. 세상 일이 어떻게 흘러갈지는 아무도 모르는 법이다. 평생 간직하고 싶은 책을 사야 하는 게 아니라 마음에 들고 손이 가는 책을 골라야 한다. 그것이 만화책이든 비닐이 씌워져 속을 알 수 없는 사악한 가격의 책이든. 아무 말 없이 아이가 고른 책을 결제해 준 나를 칭찬한다. 독서는 결국 흥미를 끄느냐 안 끄느냐의 문제인 것 같다. 재미없다는 책을 강제로 읽힐 수는 없지 않은가?


달복이는 과자가게에 이어 다른 시리즈도 안내해 준다. ‘보석가게’ 시리즈! 복실이의 눈이 반짝였다.


책에 흥미가 생기고

책에 재미가 생기고

책에 저절로 손이 갈 때까지 우리의 서점 행은 계속된다.


우리 아이들이 책읽는 재미를 아는 사람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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