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에서 티격태격 알콩달콩

by 눈항아리

바질과 민트, 쑥과 국화, 강아지풀과 설악초, 부추, 바랭이 풀과 모르는 풀, 앞쪽 잔디와 뒤쪽에 선 무화과까지. 완벽하게 어울리는 초록의 화단. 초록의 싱그러움이 좋아서 출근하자마자 사진부터 찍었다. 그런데 내 눈에만 좋아 보이나 보다. 나는 속으로 좋아서 환호성을 지르는데, 남편은 풀 정리할 궁리를 한다.


남편은 까까머리처럼 정돈된 화단을 마음에 들어 한다.

나는 자연스럽게 솟아오르는 모든 초록이를 좋아한다.


초록은 어느 틈바구니에서 올라와도 예쁘다. (조금 더 자라면 남편은 뾰족한 것을 가지고 와 파 버린다.) 바람에 한들거리는 풀들이 얼마나 예쁜지. 그것이 모여 화단 가득 풍성해지면 대지가 나를 위해 준비한 초록 꽃다발을 한 아름 가슴으로 안아 든 느낌이다. 초록 화단 앞에서 상큼한 풀잎 향을 마음으로 들이마시며 행복이라는 순간을 누린다.


그에게 ‘좋다, 완벽하다, 멋지다’ 단 한마디 말도 꺼내지 않았는데, 내가 초록 화단에 감탄한 걸 어떻게 알았을까?

이렇게 좋아서 사진을 찍어대는 날은 어김없이 예초기를 타령을 한다. 남편도 보는 눈이 있는 게다.


문제는 그의 시선과 내 시선이 정반대라는 점이다.


잡초가 무성하니 뽑고 자르고 깔끔하게 정리를 해야 한단다. 그의 풀에 대한 집념은 얼마나 강한지 모른다. 자라나는 풀들을 보면 전투력이 샘솟는 남자. 캠핑장에 가서도 잡초를 뽑는 남자다. 노지 사이트, 텐트를 칠 곳에 잡초가 있다며 멀쩡히 잘 자란 풀을 뿌리째 뽑더라는. 아이들은 왜 놀러 가서도 농사일을 하고 있느냐며 난리였다.


제초 장비는 호미가 기본, 여차하면 예초기, 전동 가위 등을 장착하고 나와 키 자란 잡초를 모두 쳐버린다. 그에게 잡초란 먹을 것을 내어 주지도 않으면서 마구 키만 자라는 이름 모를 풀이다. 자신이 심지 않은 것은 대부분 모르니 모두 잡초로 간주한다. 예쁜 꽃이 피어도 그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꽃이 피는 줄도 모른다. 그의 눈에는 보이지도 않는다. 하지만 무화과나무 아래 화단은 남편이 심은 식물로 가득하다. 가게 오픈과 함께 심은 것, 아이들과 씨를 뿌려 키워낸 애정 가득한 식물로 가득하다. 풀 숲 군데군데 우리가 손수 심은 식물까지 잡초와 함께 한꺼번에 날려버릴 수는 없어, 예초기 날은 피했다. 쪼그리고 앉아 풀뿌리를 하나하나 뽑아야 하니 땀 꽤나 흘릴 것이 뻔했다.



남편은 울창하게 자란 풀을 성가시게 한 번 쳐다보고 풀숲을 헤치고 들어가 잘 익은 무화과 열매를 따 온다. 풀도 풀이지만 무화과 따러 가는 길에 방해가 되니 눈에 거슬리는지도 모르겠다. 풀은 쑥쑥 크는데 어렵게 삽목에 성공한 작은 무화과나무는 풀에 파묻혀버려 더욱 속이 상할 테다. 정성 들여 심은 것과 잡풀이, 더불어 하나의 숲을 이루었으니 예초기로 죄다 쳐버릴 수도 없고, 잡초만 골라 뿌리를 뽑겠다고 벼르고 있는 남편이다. 초록 사이로 까만 흙이 보이면 정말 안 예쁜데. 다행히 고온 다습한 날씨 덕분에 남편은 밖으로 못 나갔다. 계속되는 무더위가 나의 초록 화단을 어찌어찌 지켜주고 있다.


날이 시원해지면 얼른 마당에 나가서 풀들을 예쁘게 단장해 줘야지. 정원 가위로 풀 머리를 좀 자르고 바질은 순 지르기도 해 주니까 같이 키를 맞춰줄까? 설악초도 그냥 같이 잘라줄까?


이렇게 화단을 사이에 두고 벌이는 우리 부부의 신경전은 이번 한 번이 아니다. 앞쪽 화단도 그랬고, 옆쪽 화단도 그랬다. 풀이 쑥쑥 크는 초여름부터 가을까지 노상 있는 일이다. 지난해에도 그랬고, 그전 해에도 그랬다. 앞으로도 쭉 계속될 것을 안다. 우리의 화단이니까.


서로 다른 우리가 만나 티격태격하며 알콩달콩 살아간다. 서로 다른 우리가 만나 작은 화단에서도 티격태격한다. 그렇게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 어울림의 모습이란 걸 나는 알아가고 있다.


초록 화단은 아직 건재하다. 계속되는 불더위에도 풀은 좋다고 키를 쑥쑥 키우고 있다. 더 크면 내가 할 말이 없어지는데... 그만 좀 크라고 말하고 싶지만 들어줄 풀들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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