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써 두려움을 털어버리고 싶은지도

by 눈항아리

며칠 전에 거실 바닥에서 말벌의 시체를 발견했다. 말벌은 말라비틀어져 있었고 허리를 반 접고 구겨져 있었다. 생명이 다한 것이 분명한데 오동통한 엉덩이는 크고 날렵하고 뾰족했다. 그 거대만 몸으로 어느 구멍을 통과해 집까지 들어왔을까 궁금했다. 죽은 왕벌의 최후는 불쌍하면서도 섬뜩했다. 눈을 부라리고 나를 노려보는 것 같았다. 감히 누구도 말벌 근처에 다가가지 못하고 이틀 후 남편에게 조용히 치워주기를 부탁했다. 남편은 무심하게 툭 집어 올려 휴지통에 넣었다. 대단한 위용을 자랑하던 날개 달린 곤충의 최후는 초라하기만 했다.



어젯밤에는 말벌이 현관으로 들어왔다. 누구를 따라서 들어왔는지, 이미 낮부터 들어와 있다 저녁이 되어서야 발견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벌은 좁은 현관의 공중을 누비며 왱왱거렸다. 놀란 복동이가 거실 중문을 꼭 닫았고, 절대 열지 말기를 당부했다. 말벌의 크기가 엄지손가락만 하다고 했다.


아침에 남편이 약을 뿌리는 시늉을 했으나 이미 녀석은 사라지고 없었다. 아이들은 농사 모자를 들춰보고 잘 살펴보라고 했고, 신발 어딘가에 떨어져 있는 건 아닌가 살펴보길 바랐다.


커다란 왕벌은 어디로 갔을까.


그러고 보니 출근길이 바빠 신발에 벌이 떨어져 있는지 없는지 확인을 못했다. 내 신발에는 없었으니 다행이다.


출근 준비를 마치고 현관문을 열고 나왔다. 말벌의 보금자리가 되어버린 계단 아래 빨간 우체통에서 벌이 한 마리씩 날아오른다. 우리의 출근 시간에 맞춰 벌들이 마침 출근 비행을 한다. 한두 마리면 이해하지만 단체 비행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계단을 점령하고 마당을 맴도는 무리의 벌들 때문에 복실이와 멈칫했다. 우리는 빙 둘러 비탈을 내려가 얼른 차에 올라탔다.


“여보, 벌이 날아올랐어. 우체통을 좀 어떻게 해봐요.”


몇 해 전 우편물을 꺼내다 벌에 된통 쏘인 남편이 벌집을 다 없앴는데, 한 해 지나고, 두 해 지나 또 벌집을 지었다. 벌집을 없애도 다음 해 같은 장소에 집을 짓는다고 한다. 그것이 틈새라면 꼭꼭 막으라고 한다. 우체통을 막을 수는 없고, 아예 없애버려야 할까.



우리 집 근처에서 말벌의 주 먹이는 참외다. 참외 파먹는 걸 주로 봐서 그런 줄 안다. 참외밭에 참외를 따러 들어갔다가 말벌이 식사 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조용히 뒷걸음쳐서 도망 나온다. 벌들의 식사가 끝나면 참외를 따면 될 일이다. 말벌은 자신들의 행동반경 안으로 들어오면 공격한다. 터널에 심은 참외가 노랗게 익어가는데 따러가기 겁난다.




아주 어릴 적, 벌침에 한 번 크게 쏘였다. 그때 손등이 퉁퉁 불어 올랐었다. 아픈 기억은 없다. 그런데 40년 전, 학교도 들어가기 전의 기억이 이렇게 선명한 것을 보면 어린 내가 많이 놀랐었나 보다.


커서는 단 한 도 벌에 쏘인 적이 없는데도 나는 놀란 기억을 두고두고 가슴에 품고 산다. 자꾸 되새김질한다고 덜어지는 게 아닌 걸 알지만, 습관처럼 나는 벌을 보며 두려움을 떠올린다.


벌들의 움직임이 왕성한 시기, 아무쪼록 물리지 않기를 소망한다.



무서움, 두려움, 공포에 관한 글을 왜 자꾸 쓰는가.

나는 그것이 궁금하다.

나약한 내 모습을 굳이 문자로 적어 드러낼 필요가 있을까.

무의식이 나를 그리로 이끌었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쓰고 또 쓰고 하면서,

글로써 두려움을 털어버리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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