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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히 라 Aug 19. 2021

별세

기록하는 기억 ㅣ 하히라의 한중록

할아버지의 별세



 2021.03.19 금요일 아침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평소에는 일이 있어야만 걸려오던 엄마의 전화벨이 울렸을 때, 나는 정말로 무슨 일이 있어서 엄마가 연락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고 세상 밝은 목소리로 전화에 응했었다.  할아버지의 부고 소식을 듣고 출산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내가 갓난쟁이를 데리고 올 필요 없다며_ 황서방이나 혼자 내려와 인사드려도 된다_ 그렇게 말씀하셨다. 아니 그냥 너희는 안 와도 되니 그리 알고 있으라고_ 다시 정정하여 말씀하셨다. 그래도 나 또한 조문드리겠노라 그러고 싶노라 내가 다시 의사를 밝혔을 때 엄마 아빠는 아기를 데리고 힘들게 어떻게 오려하냐고 근심과 걱정을 담은 목소리를 전하며 잘 상의해 보고 연락하라며_  그렇게 전화를 끊었다.


아침 낮잠으로 첫 번째 잠을 자고 있던 아기가 엄마의 전화를 마치자마자 칭얼대며 깨어났다. 할아버지가 조만간 돌아가실 거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슬픔이란 감정은 어쨌든 내게 다가왔다. 아기침대에서 해맑게 웃는 아기를 보며 흘러내린 눈물과 콧물을 닦으며  "우리 아가는 할아버지 얼굴도 못 봤네 - " 라며  후회했다.  아니 보셨더라도 내가 낳은 아기라는 걸 알려드려도 아마 또 잊어버리시고 기억 못 하셨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한 번은 보여드렸으면 좋았을 텐데, 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말년에 할아버지는 내게 존댓말을 쓰며 " 무슨 일로 여기 오셨소?  안에 사람이 있으니 들어가 보시오 - " 라며 자신의 집으로 나를 안내했다.



그렇다. 할아버지는 치매끼를 보이셨고 후에는 좀 심각하리만큼 증상이 악화되어 길을 잃고 다쳐 쓰러진 채로 응급실에 실려가 경찰에서 연락이 온 적도 있었다. 그때 그 응급대원이 어찌하여 내 번호를 알고 제일 먼저 취한 연락의 상대가 나였는지는 아직까지도 미지수로 남아있다. 할아버지의 아들인 나의 아빠도 아닌 그리고 엄마도 아닌 장손인 오빠도 아닌, 할아버지가 계셨던 문경에서 살고 있지도 않은 나에게 말이다.


그때  그렇게 나에게 처음으로 연락이 왔을 때 나는 어쩌면 할아버지가 나라는 사람을, 자신에게 있는 유일한 손녀를 특별하게 저장해 놓았거나 어쩌면 내가 할아버지 손전화의 단축번호 어디쯤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다. 나와 할아버지는 전화를 자주 하는 사이도 아니었는데도 말이다. 생각해보면 할아버지는 그때 그날 그 사건 이후 나에게 용서를 바라며 나를 보듬고 아끼고 싶으셨는지도 모른다. 그동안 행하지 못했던 사랑을 내게 뿜어 내고 싶으셨는지도 모르고 나를 더 특별히 가까이하고 싶으셨던 것 같기도 하다. 그때 그날 할아버지는 내게 연신 미안하다- 내가 잘못했다-는 말로 나의 등을 쓰다듬으셨고 그런 일을 왜 여태껏 말하지 않았냐며_  그렇게 나를 원망했었냐며_  내가 너 이름을 지어주었다고_  내가 널 얼마나 아끼는지 왜 모르냐며_  네가 태어난 그 해와 달 그리고 그날과 시를 합쳐 너의 이름을 내가 직접 지어줄 만큼 널 소중히 생각했다고_  미안하다고 몰랐노라고_  그렇게 말씀하셨다.


어쩌면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을 한 번에 내뱉으셨던 그날의 할아버지를 나도 한 번에 용서했었다. 아니 사실 할아버지를 원망하고 미워한 적은 없었다. 그저 할아버지가 가지고 있던 남아선호 사상의 피해자로서 그 책임을 물어본 것뿐이었을지 모른다.




거실을 뱅뱅 돌며 ' 그렇게 우리 엄마를 힘들게 하고 가셨네- '라는 소리를 몇 번 되내었다.


"  엄마만 고생했어. 진짜 정말로.

 내 인생 이렇게 힘들게 하고. 우리 엄마만 고생시키고.  "


미우면서도 안타깝고 슬프면서도 그리운 느낌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나에게 할아버지는 무서운 분이셨다.

얼마나 무서웠냐 말하자면_  같이 있는 거 자체를 피하고 싶을 만큼 무서웠다. 그런 할아버지의 헛기침소리 나 집에 다다르고 있다는 공식적인 신호였던 할아버지가 타고 나가셨던 오토바이 소리가 가까이 들려올 때면 얼마나 긴장했는지 모른다.


할아버지는 그렇게도 여자는 쓸모없다 말하셨다. 아들이 최고이고 여자는 쓸데가 없다는 이야기를 주야장천 말하셨다. 본인도 엄마라는 여자에게서 잉태되어 태어난 인간이면서 어찌 여자를 저렇게 말하고 평하는지 _ 내 할아버지가 얼마나 모진 사람이냐면 저런 말을 어리고 어린 내게 수십 번 말한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오빠에게서 "너도 들었지? 할아버지가 넌 필요 없는 인간 이랬어! 그러니 맞아도 돼" 라면 두들겨 맞은 적도 있었고 여자이기에 쓸데없으니 나가죽으라는 말도 들어왔었다.


그렇게 내 인생을 망친 장본인이자 할머니 병간호와 자신의 간병 그리고 치매가 걸린 말년까지 맏며느리인 엄마에게 모든 수고를 들게 한 사람이 내 할아버지라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여자는 쓸데없다 해놓고 우리 엄마라는 여자를 그렇게도 많이도, 그리고 알차게 쓰셨던 분이셨다.




향년 90세에 숙환으로 별세하신 나의 할아버지.


미웠던 마음과 당신을 무서워했던 그 어린 시절이 지배적인 기억이지만 알 수 없는 슬픔과 인간의 인생이란 이리도 허무한가를 생각하며 나는 눈물과 콧물이 넘쳐흘렀고 얼굴은 빨갛게 열이 올랐다. 장례식장에 도착해 엄마와 밥을 먹었다. 아기를 보기 위해 남편과는 교대로 왔다 갔다 하며 인사와 식사를 따로 하였다.


마주 앉아 육개장을 먹던 엄마는 최고 좋은 수의를 해 입혔다고 내게 말했다. 그리고 정말 마음에 들도록 너희 할아버지 마지막 가시는 모습이 단장되었노라 말씀해주었다. 어쩜 그렇게 깨끗하고 이쁘게 계신다고 말이다. 그 말을 하는 엄마의 표정이 한껏 야무진 걸 보니 진정 그러한 것 같았다.


엄마는 어쩌면 너희 할아버지는 그렇게 고맙게도 아침에 가셨으며_ 나를 위해 이리 장례 준비도 차근히 할 수 있는 시간을 주시냐며_  새벽잠은 깨우지도 않고 너무 늦은 밤에 가시지도 않아 하루를 허이보내며 삼일장을 치루지도 않고 장례 손님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고 말했다. 내가 복이 참 많아 좋다는 말도 이어졌다.






엄마다웠다.


세상 모든 일을 감사히 여기고 고마워하시며

이치와 가치를 좋게 여기는 그 마음이 그날도 여전히 엄마다웠다.








엄마는 불만이 없었을까?


아무리 맏며느리라고 해도 시어미 밑까지 닦아주며 병시중을 들던 십 년 전에도 그리고 다 늙어 치매까지 온 시아비 똥을 받아내고 밥상을 차려줘도 밥도 안 줬다는 핏박을 받아냈으면서도 그렇게 가신 날마저 자신이 복을 받았다고 미소 띠며  그리_ 또 그렇게 고마이 여기고 있으니 말이다.


한번 먹은 반찬은 다시 드시지 않았다. 다른 반찬과 국을 올려야 했고 찬밥이란 근처에도 가시지 않는 분이셨다. 할머니가 병중에 있을 때도 병원 냉장고에 밑반찬을 가득하여 접시 하나하나 닦아가며 그 종류를 다르게 상을 차려드린 사람이 내 엄마라는 사람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할아버지는 평생 궂은일이랑 안하셨다했다. 논과 밭이 있어도 일은 할머니가 하거나 세를 주셨고 가다마이 입고 출근하고 퇴직 후엔 등산모임이나 날짜 맞춰 나가시던 분이셨다.


온전히 혼자서 독단전으로 위엄있고 권위있으셨으며

늘 단정하고 바른처신을 하셨던 분이셨다.


다른어떤 이는 몰라도 내 할아버지는 그러셨다.



할아버지 집에는 늘 숫자가 커다란 달력이 있었다. 그 달력에는 한 달에 한번 꼭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었는데 그날이 바로 할아버지의 등산모임 날짜였다. 동그라미 아래에 그려진 작은 칸에는 어느 산을 가는지 어디서 모이는지 몇 시에 그들을 만나는지 등이 적혀있었다. 내가 방학 때 시골에 가면 그렇게 동그라미를 쳐놓은 날은 할아버지가 새벽 일찍 나가 밤이 늦어도 들어오시지 않는 날이었기에 나는 그날이 참 좋았다. 어렵고 무서운 할아버지를 대면하지 않아도 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꼭두새벽에 산을 타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는 할아버지 품에 그보다 더 일찍 일어나 도시락을 싸주셨다. 그 도시락 반찬이 무엇이었는지 나는 모르나 고모 삼촌 모두 모여 웃고 떠들던 명절날이면 할아버지는 손에 끼고 있는 커다란 금반지를 자랑하며 이 반지가 우리 등산모임을 몇 년을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나가야 받을 수 있는 것이라고 자랑을 하면 손을 올려 보여주실때 마다 삼촌 고모는 그 반지를 할머니에게 주라고 말했었다. 우리 엄마가 그 반지 끼어주려고 도시락을 도대체 몇 번을 싸준 거냐고 소리를 높이며 말이다. 아빠 삼촌 그리고 고모들 모두 그리 말하는 이유는 아마 할아버지의 밥상을 위해서는 얼마나 크나큰 정성을 다해야 하는지 알기 때문일지 모른다.






 할아버지는 공무원이셨다. 그런 할아버지의 방에는 작은 좌식 책상이 있었다. 예의가 다 정립되지 않았고 장난을 좋아하던 그 어렸던 시절에도 나는 할아버지의 그 책상만은 건들지 않았다. 아니 건드릴 수 없었다. 그건 할아버지의 것이었고 할아버지는 무서운 분이셨으며 내겐 너무나 어려운 분이셨기 때문에 차마 건드릴 수도 없었고 살짝 훔쳐보기도 여간 어려웠다. 지나가며 힐끔힐끔 쳐다보던 그 작은 책상에는 늘 주판이 놓여있었고 수첩과 옥편이 있었다. 할아버지는 내가 아는 사람 중 한자를 가장 많이 아는 분이셨다. 국민학교밖에 나오지 못했던 할아버지가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을 겪으며 살아남아 유일하게 할 수 있었던 공부는 한자였다고 한다. 장남으로 태어나지도 않았기에 돈을 내야 갈 수 있던 중학교는 쳐다보지도 못했던 할아버지는 한자를 공부했다고 한다. 그렇게 한 획 한 획 익히고 외운 한자는 할아버지를 공무원으로 만들어 주었다. 문경에서 가장 높은 사람도 종이를 들고 찾아와 이 한자가 무엇이고 그 뜻이 어찌 되며 어찌 해석해야 하는 문장이냐며 그렇게 할아버지를 찾았다고 하였다. 그런 할아버지는 자신이 올라갈 수 있는 위치까지 직급을 올려 승진하셨고 그리하여 고모들이 학교를 다니던 시절에 아버지가 누군지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고 하며 네가 누구 딸이냐면서 할아버지 이름을 언급하며 니 아버지 뭐하시는 분인지에 대해 학년이 올라갈 때마다 그토록 주목을 받았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매일 일기를 쓰셨다. 할아버지의 책상을 훔쳐보지도 못했던 나는 그 사실을 알리 없었지만 엄마가 알려준 사실이다. 너희 할아버지는 정말 대단하시다. 정말 바르고 흐트러짐이 없으신 분이라고 엄마는 말씀하셨다. 그 이유의 첫번째가 바로 일기였다. 그러면서 너희 할아버지 일기장은 읽고 싶어도 제대로 다 읽을 수가 없다는 말을 덧붙이셨다. 할아버지는 일기를 한문으로 쓰셨다. 그내용은 대충 오늘의 날짜와 날씨 그리고 무엇을 하였는지를 간략하게 쓰셨다고 한다. 엄마가 훔쳐보고 간략히 추론할 수 있었던 할아버지의 일기속에는 추석이라 아들내외와 자식들이 왔고 오후에는 칼국수를 먹었으며 장을 보고 온천을 다녀왔다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자신에게 어떤일이 있었는지를 적으셨다고 한다. 이 사실은 나를 일기를 쓰는 사람으로 만들어주었다. 일기란것이 숙제라고 여겼던 나에게 나이가 지긋하게 드신 할아버지에게 숙제를 내는 선생님도 없는데 스스로 그것을 기록하는 것은 심히 충격적이었고 늘 꼿꼿하게 올바른 모습을 보여주는 할아버지가 행하시는 그 기록의 사실을 알게된 뒤 나또한 스스로 기록하는 습관을 가져다 주었다. 후에 할아버지가 무섭지 않아지고 할아버지의 책상을 보는것이 두렵지 않아졌을 몇해 전에 나는 할아버지의 일기를 본적이 있다. 그때까지도 내 할아버지는 기록을 멈추지 않으셨더라. 정말 엄마말대로 오늘 무슨일이 있었는지 간략히 적은 그 일기는 점점 하루하루 빼먹는 날이 종종 있어왔다. 그리고 치매가 오신뒤에는 거의 쓰실 수 없었던것 같다. 그래도 할아버지는 끝까지 기록과 배움을 끊지 않으셨다. 여권에는 영어로 1월부터 12월까지,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적고 외운 흔적이 남아있었으며 높지도 않은 그 작은 책상위에는 늘 옥편이 펼쳐져있었으며 그때까지도 필요하면 주판으로 셈을 하셨다.



그런 할아버지는 치매가 왔지만 신사 다움은 잊지 않으셨다. 살면서 집 밖으로 나갈 때는 기필코 셔츠만을 입으셨던 할아버지는 기억은 아무리 가물가물해질언정 단추가 달린 셔츠에 마이를 걸쳐 입고 마지막으로 중절모는 꼭 쓰고 나가셨다. 편한 티셔츠 한 장 걸치면 그만인 것을 정신도 온전치 못하신 분이 꼭 셔츠를 입고 단추를 잠가 겉옷까지 챙겨야 집밖을 나가셨다. 엄마는 그걸 또 그렇게 빨아주시고 다려주셨다. 평생 곱게 단정하게 지내시던 분이 갑자기 어찌 바뀌겠냐며 당연한 일이라고 여기면서 말이다. 할아버지의 리즈시절은 문경에서는 가장 잘 나가던_ 문경 사람들이 다 알아보고, 지나만 가도 쳐다보던, 어쩌면 국민학교밖에 나오지 않았던 자신이 올라갈 수 있었던 최고의 고위공무원이었을지도 모르는 그때였을 것이다.  어쨌든 그 덕에 아빠와 엄마의 주례는 할아버지가 살고 있는 면의 장님 그러니까 '면장님'께서 직접 오셔서 봐주셨다고 한다. 그것도 부탁한 것은 아니었지만 먼저 해주겠노라- 해주고 싶노라- 하셔서 맡게 된 것이라고 들었다.



내가 결혼할 때는 문경시장님이 오셨다. 결혼식장은 아니고 문경에서 하는 피로연에 말이다. 문경시장님은 아빠의 친구였다. 아빠는 그 누구보다 인맥이 화려한데 그중에서도 동기동창모임을 가장 아끼는 편이시다. 단 하나밖에 없는 딸이 결혼하니 동창 친구로서 축하해주러 온 문경시장님 덕에 내 피로연은 조금 품위가 있어졌다고 말할수 있다. 그런 와중에 치매끼로 정신이 오락가락하시던 할아버지는 어쩐 일인지 정신을 버쩍 드시고 아빠에게 말하셨다.




네 친구는 시장씩이나 하는데 너는 뭐하냐?





할아버지는 그런 분이셨다.


그런 것이 바로 할아버지 다운것이었다. 그래 그랬지, 우리 할아버지 독하시고 무서우셨지. 아빠는 그 말이 참 아팠나 보다. 옆에서 지켜보던 막내 고모는 참 모질다 싶어 불만은 토하면 얼굴을 찡그렸다. 나는 그런 아빠에게  "나도 스물몇 살 때 김연아처럼 금메달 못 땄고, 할아버지도 링컨 나이 때 대통령도 못됐으면서 !  아빠한테 왜 그러신대?  그런 말 할 자격은 링컨 같은 사람이나 하는 거야!! " 라며 내 아빠의 쓰라린 마음을 달래주었다. 아빠는 딸을 참 잘 키웠다. 그러니까 아빠는 나를 참 잘 키우신 거 같다. 이렇게 세상을 완벽하게 찔러대며 바라보고 사고하는 인지력 좋은 사람으로 키운 건 아빠이다. 그런 아빠를 그토록 좋은 날에도 상처 주신 분이 바로 내 할아버지시다. 그래 맞다. 할아버지는 문경에서 제일 잘 나가는 공무원이었으니_ 그러니 저러시겠지.


하필이면  그때는 또 어떻게 정신이 번쩍 들어오셨데?






 어느 날은 할아버지가 보이지 않아 온 동네를 찾아다녔다고 했다. 그런 할아버지를 단번에 찾아낸 사람은 그의 아들이 아닌 며느리인 우리 엄마였다. 불 꺼지고 무너져내리는 큰집 툇마루에 우두커니 앉아 있던 할아버지에서 다가가니 중알 중얼 그 옛날 옛적 이야기를 하고 계셨다고 한다. 집에 가자는 엄마의 말에 " 여기가 내 집인데 어딜가오? " 하며 과거로의 여행을 멈추지 않더니 갑자기 "형수 내가 세 들어 살아 미안하오" 라며 엄마를 자신의 형수님으로 대하더라이다.


할아버지는 결혼하고 잠시 큰집의 사랑방에서 살림을 시작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큰 형님이 사고로 돌아가셨고 둘째 형님도 잘못되니 어찌어찌하다 젊은 나이에 그 집안의 제일 어른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할아버지는 격식과 예의 그리고 전통을 지키려 노력하셨다. 위아래 촌수를 엄밀히 따지셨고 풍양 조 씨 다른 집안의 뿌리에 누가 되지 않도록 그렇게 위엄을 장착하고 늘 헛기침을 하며 말을 아껴가며 무엇보다도 처신을 지키며 살아가셨다.


갑작스럽게 저세상을 가시게 된 형의 집에서 살수 밖에 없었던 뭐도 없는 살림이라 젊은 형수와 그 시어미인 할머니까지 같이 사는 그 집에 얹어가는 것이 폐가 될까 죽을둥 살둥 돈을 벌어 나가고자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고 한다. 한집 땅을 사긴 어려워 반토막 낸 집터가 나왔길래 어야 좋다 달려갔더랬고, 그 집 앞 밭이 또 나왔길래 집 앞이라 저 땅은 꼭 내 땅으로 만들겠노라 돈을 모으고 모아 자신의 것으로 가져갔다고 한다. 대대로 내려오던 논을 큰집에서 형편상 팔아버리자고 했을 때는 어디 조상님 땅을 함부로 하냐며 버럭 화를 냈었고 젊지만 그 집안의 어른이 된 자신이 절대 용납 하지 못하겠노라 빚을 내어 지켜냈다고 했다. 그리고 그렇게도 처신을 지켜오셨고 족보는 온도와 습도를 맞춰주는 책장을 구입하면서까지 색이 더이상 바래지 않도록 소중히도 보관하셨다.


할아버지에게는 지켜야 하는 무게가 있었을 것이다. 분명히 첫째도 아니었고 둘째도 아닌 셋째로 태어났는데 어느 날 갑자기 장남 역할을 해야 했고 그 집안의 어른이 되었다. 아무도 그렇게 보지 않았지만 그 누가 우리 집안을 욕할까 걱정했고 그 누가 우리를 얕잡아 보게 될까 자신을 추켜세웠으며 그 누가 해를 가할까 성공해야 했었다. 할아버지는 그렇게 자신의 길을 곧이곧대로 가셨다. 그리고 자신의 신념대로 해내신 자신에게 그 누구보다 관대했고 다른이에게는 그리도 야박하셨다. 어려운 중에 해낸 자신보다 더 좋은 환경에서 해내지 못하는 것이 성에 차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런 할아버지의 다문 입술이 무서웠고 그런 할아버지의 헛기침이 참 두려웠다.

행함이 바르고 처신을 옳게 해야 했었다. 아무리 쓸데없다는 여자라도 말이다.




유교사상과 남아선호 사상의 끝을 보여주셨던 할아버지의 집에서는 밥상도 따로 되어있었다. 그러니까 남자상과 여자상이 따로 놓인다. 남자상은 크고 널찍했으며 앉았을 때 수저를 들기 딱 좋은 높이였다. 여자쪽 밥상은 달랐다. 높이도 낮았고 딱 봐도 두세 명이 앉으면 끝날 것 같은데 그곳에 여섯 일곱이 모여 밥을 먹었다. 양반인 남자상에 감히 여자는 함께 식사하지 못했다. 나는 그것이 불공평하다고 여기진 않았다. 그냥 그렇게 어릴 때부터 보아오던 광경이라 그러려니 했던 것이다. 사실 나는 그것이 편했다. 할아버지와 마주 보고 밥을 먹는 것이 더 어려웠기에 구석에 있는 그 여자들만의 밥상에 가서 먹는 것이 훨씬 좋았다. 가끔 할머니는 예외였다. 명절이나 할머니의 생신날에는 할아버지 옆에 자리를 잡으실 수 있었다. 그런 날은 여자가 아닌 '어른'으로 공경받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나에게는 잘 웃어주지 않던 할아버지는 막내 고모가 아들을 낳아오니 그 아이를 하늘 높이 올려 서울구경도 시켜주고 간지럼을 태워 이리저리 굴려도 주셨다. 내 평생 할아버지가 아이와 놀아주는 것을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일 것이다. 그렇게 둘이 깔깔 대는 것을 보며 할아버지의 입술이 굳게 닫혀져있는것만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막내 고모의 아들은 할아버지의 책상도 함부로 만질 수 있었으며 그 위에 놓여있던 주판을 가지고 바닥에 굴려대며 바퀴 놀이도 해대었다. 나는 한 번도 행할 수 없던 것들을 그 아이에게 허용하는 것을 보고. 아직은 어렸던 그때의 나는 그 아이가 남자라서 그런가 보다- 라고 생각했었다.


그 아이의 외할아버지였던 나의 할아버지는 그 아이의 친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기에 이 아이에게 할애비가 단 하나밖에 없어 참 안되었다고 자신이라도 잘해주고 싶다- 그리 말하셨다. 내 외할아버지도 돌아가신지 좀 되었지만 말이다.


할아버지는 그랬다. 나에게는 엄했고 막내 고모 아들에겐 후했다. 아니 그냥 아들에게 후한것으로 보였다. 막내삼촌이 아들을 낳아왔을때도 그리도 이뻐하고 뽀뽀하고 얼싸안기마련이었으니까. 할아버지가 장난도 치고 소리 내어 웃고 간지럼도 태울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사촌남자동생들을 대하는 모습을 보며 그때 알았다.





 재수를 하고 대학을 합격하고 찾은 설에 할아버지는 내가 어느 대학을 갔는지 재수를 왜 했는지 관심이 없었다. 여자가 대학을 간 것에 대해 세상이 변했으니 공부해보라고 하셨을 뿐이었다. 그렇게 21세기를 넘어 이천년이 넘어서까지도 할아버지는 남아를 선호했다. 그해 전에 내 사촌이자 나와 동갑이었던 포항고모의 아들이 경희대 한의학과에 수시로 합격했기에 내가 나름 좋은 대학을 간 것은 축하할 일도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는 시골에 잘 가지 않았다. 명절이면 페이가 세게 나온 파트타임일을 했었고 문경은 그렇게 내게서 점점 멀어져 가고 있었다.


스물여덟, 확실한 취직은 뒤로하고 미술관과 갤러리에서 대학원을 가기 위한 돈을 벌며 공부만 하다 결국 실패하고 시간을 보내던 나는 내하루 시간의 절반이상을 쓰는 회사에 들어갔다. 다른 목표가 아닌 그저 일을 했다. 엄마는 좋아했다. 그런 내가 이제는 돈을 벌어 결혼하면 된다며서 말이다. 그렇게 회사를 다니던 해 가을 추석에도 나는 서울에 남으려 했었다. 추석 당일 엄마는 울먹이며 내게 전화했다. 내가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많이 해놔도 내 자식은 못 먹이니 서럽다고 말이다. 삼촌 고모 아들딸 먹이자고 고생하고 싶지 않다고 말이다. 아니, 그래도 되는데 내 자식 먹이고 싶다고 말이다. 엄마는 그렇게 내게 명절다움을 함께 하자고 내려오라고 하셨다. 나는 엄마 말을 잘 듣는 딸이었고 그렇게 말하는 엄마의 마음을 달래주고 싶어 버스를 예매하고 바로 문경으로 내려갔다.


추석은 이미 끝났었다. 빨간 날은 하루 남았었지만 엄마는 추석날에 딸은 보아 너무좋다 연신 웃어댔다. 나는 좋은 딸은 아니었다. 늘 내가 우선이었고 내 위주였다. 엄마 마음이나 엄마의 상황은 생각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엄마는 나를 안아주고 보듬어 주었다. 그럼에도 엄마는 내가 우선이고 내가 최고라 하신다.


그날이었다. 그때 그날 그 사건으로 불리는 날은 바로 그날 밤이었다. 할아버지도 오랜만에 뵙게 된 거였지만 시골에 가지 않고 멀어진 이유는 가족사에 있었다. 우리들만의 가족사를 활자로된 기록으로 남기는 일이 어렵고 두렵다. 그냥 내게서 시골과 할아버지는 어쩌면 그 이유의 처음으로 여기고 싶었던 것인지 어쩐것인지 그때 그날 그날밤의 나는 할아버지의 그 남아선호사상으로 내가 이리되었노라 울부짖었다. 내가 이렇게 멍들고 아픈 이유와 내가 엄마 아빠품에서 오래도록 같이 함께 하지 못한 이유를 할아버지에게로 넘겨버렸다. 당신이 그 웃어른 행세를 하며 위엄을 지키던 순간 나 좀 돌봐줄 수 없었냐고 말이다. 손녀의 절규에 할아버지는 해결은 못하지만 미안함을 가득 담아 상처뿐인 나를 다독여주셨다. 그때 그날 그 밤에 나는 그렇게 사과받았다. 그 사과로 인해 문경은 내게 어느날 갑자기 가까워졌다. 할아버지는 내게도 막내 고모의 아들만큼이나 살가운 분이 되셨다. 내 하는 모든 일은 어찌 대단하다 여겼는지 말해주셨다. 한 번도 네가 못할 거라 생각한 적 없다 하셨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 널 응원했노라. 널 이렇게 십년이 되도록 못보것이_ 그 시간이 너무 아깝다 하셨다.




사실 할아버지는 매번 내게 어느 학교에 다니냐고 물어보셨다. 올해는 몇학년이냐. 그래서 몇반이 되었느냐. 어릴때 그런질문을 받으면 할아버지가 내 학교에 와보지도 않을 것이며 우리반에 오실일도 없는데 왜 자꾸 물어보시는 건지 대답하기가 별로일때가 더 많았다. 하지만 매년 할아버지의 물음은 계속되었고 언제나 그학교는 어디에 있냐 ? 라고 지명을 물어보셨다. 그러면서 할아버지는 마지막에는 꼭 한마디를 하셨다. "그래, 공부잘하고 더 멀리 가봐라. 나처럼 이렇게 우물안 개구리처럼 문경에서만 살지말고 너는 꼭 여기저기 멀리다녀봐라." 할아버지는 6.25전쟁 피난을 다니면서도 결국 문경으로 왔고 문경에서 태어나 자라 문경에서 돌아가셨다. 그런 할아버지에게 내가 다니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의 위치는 가히 물어보고싶은것이었고 어디쯤있나 상상하고 싶은 것이었나보다. 그렇게 내가 학교를 마치며 공부할때마다 응원해 주셨음을 나는 왜 이제야 기억하는것일까.


할아버지가 등산에 집착했던 이유는 문경이 아닌 다른곳을 다녀보고싶어서였을지 모른다. 할아버지와 함께 차를 타고 가면 멀리있는 산을 보며 그 능선따라 지명을 줄줄 알려주시곤 하셨다. 내 할아버지는 우물안개구리가 되고싶지 않아 그토록 퇴직후에 우리나라의 갈수 있는 온갖산을 최선을 다해 열심히 오르고 내리셨다. 그리고 언제나 최선을 다하는 나의 할아버지는 자신이 갈 수 있는 대한민국의 모든 산을 무조건 다 올라가 보셨다. 어느날은 백두산에 가겠노라 할머니와함께 여행을 가셨는데 중국을 통해 등반했고 백두산천지에서 찍은 비디오테잎을 틀어 보여주시며 "내가 이제 우리나라의 모든 산을 다 가보았노라" 말씀하셨었다. 역시 할아버지 다웠다. 그때 그 여행을 다녀오시면서 나와 오빠에게 돌맹이를 하나씩 선물로 주셨는데 할아버지의 말투따라 "호괭이눈깔로 만든것" 이라고 하셨다. 나는 그 "호괭이" 라는 발음이 참 낯설게 느껴져서 중국말인가생각 했는데 알고보니 고양이 눈을 가지고 만든 돌이었다. 그것은 고양이의 신비스러운 눈을 굳혀 만든 중국 기념품이었다. 그중에 아빠에게 주신 가장큰것은 호랑이 눈이라고 하였다. 호랑이와 고양이를 합친 거였나보다. 할아버지가 발음하시던 호괭이라는 그 말 말이다.   




그때 그날 그날밤 이후 할아버지는 내가 보낸 엽서 하나를 받고도 너무 고맙다 전화하셨고 엄마에게는 이것을 보았느냐고 몇번을 보여주셨다고 하며 온 동네 자랑을 하시고 다니셨다고한다. 문경에 다녀오고 나면 집에 잘 도착했노라 엄마 아빠뿐 아니라 할아버지에게도 안부를 전하고 묻게 되었다. 모든 상처가 씻겨나가고 아물진 않는다. 그 상처를 낸 건 할아버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단지 나와 엄마 아빠는 그 시발점과 이유를 할아버지에게서 찾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아빠 엄마는 아닐지라도 적어도 나는 그랬다. 그렇지 않으면 이해할 수 도 없고 이해될 수도 없는 그래서 더 소리 내지도 못하고 울기만 할 일이기 때문이다.







 나의 할아버지는 그 뒤로 남은 여생을 나와 살갑게 보내셨다. 그러다 치매가 오셨고 체통은 없어지고 하루하루 힘이 없어지시더니 말라만 가셨다. 그 할아버지를 돌보느라 엄마는 자신의 엄마인 내 외할머니는 일찍이 요양원에 보내셨다. 내 할 일이 이것이라 우리 엄마는 못 챙긴다면서도 며느리로서 시아비가 우선이셨다.


할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엄마는 "이제 저도 더는 모실 어른 없어요." 라는 말로 할아버지를 보냈었다. 나는 사실 어떻게 할아버지를 보내드려야 할지 모르겠다. 사실 나는 그 누구보다 할아버지를 좋아하고 존경해왔는지 모른다. 같이 보낸 시간보다는 할아버지가 전해준 것들이 나라는 사람을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냥 가끔 할아버지는 그랬었다며_  모질게 기억이 날 수도 있고,  할아버지는 그래도 이랬었다며_  내 마음을 위로할지도 모르겠다.



사람이 죽으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장 많은 기억 속으로 돌아간다고 들은 적이 있다. 늘 어린아이처럼 마음을 가지면 천국에 가서 어릴 적 모습을 하게 된다는 이야기도 있다. 할아버지는 아마 그 하늘나라라는 천국에서 문경에서 제일 잘 나가던 그 시절 공무원의 모습으로 옥편과 일기장을 지닌채 위엄있게 지내시지 않을까 싶다.






할아버지  이제 안녕,
가끔 당신을 생각할게요.








싸이월드 사진첩이 복구된다면, 언젠간 올려두었던 할아버지 사진을 이곳에 업데이트 하고 싶다.
-라고 적어놨었다.

그리고 싸이월드 복구 이전에 지난 메일함에서 사진을 찾았다. 아빠의 총각시절 사진과 할아버지의 흑백사진 그리고 엄마의 환하게 웃고있는 사진을 함께 찾았다. 그때 어딘가로 저장하기 위해 이메일을 이용했던게 나에게 기록을 고스란히 남겨주었다.

이곳에 저장해 놓는 할아버지의 사진도 언젠간 다시 본다면 또 생각이 많아지고 그렇게 할아버지를 떠올릴 것 같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보관된 사진의 해상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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