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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히 라 Feb 18. 2022

남의 결혼식

기록하는 기억 ㅣ 하히라의 한중록

다른 사람의 결혼식



 언제부터인가 친구들의 결혼식에 가면 울고 왔다. 스물몇 해 어린 시절의 친구가 결혼한다며 청첩장을 집으로 보내오고 결혼식장의 위치를 자랑해 낼 때 나는 이제 막 대학교에서의 시간을 즐기고 있을 때였기에 결혼이라는 제도와 그 식의 의미 그리고 그 중차대함을 느끼지 못하고 내게 다가오기엔 이른 일로 치부하긴 했지만, 왜인지 모르게 그 식장에 선 그날의 주인공인 한 여자를 알고 있는 나로서는 참석한 그곳에서 그리고 돌아와서도 마음이 참 싱숭생숭했었다. 내 기억으로는 식을 보고 돌아와서 일기를 썼고 왜인지 펑펑 울었다. 식장에서는 울렁거림이 있었지만 울어버리고 싶진 않았었다. 내가 그날 일기까지 쓰게 된 이유는 결혼식이라는 것으로 인해 여자의 인생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는 시간이었기 때문일지 모른다. 그것이 어쩌면 내 인맥으로 맺어진 지인의 처음 결혼식이었다.


그리고 고등학교 친구가 결혼하던 28살에는 함께 참석했던 친구의 눈물에 따라 옆좌석에서 조금 울기 시작했고 서른 즈음 내가 소개했던 남녀가 나름의 긴 시간의 연애의 만남과 헤어지기를 반복하다 결혼을 하겠노라 초대했던 그 결혼식장에서는 속이 얽히도록 감정을 품어내며 울어냈었다. 엄마의 친구나 아빠의 지인의 결혼식이 아닌 내가 아는 이의 결혼식에 훨씬 많이 가게 되는 나이가 되었을 때부터 내게서 그 결혼이라는 식의 의미는 달라져있었고, 결혼식 자체가 흥미롭기로 했었다. 무조건 잠자코 자리를 지키며 몸을 꼬아가며 참아내던 지겨운 결혼식이 아닌 내가 아는 이의 결혼식은 참 예쁘고 재밌지만 눈물이 났다.


그런 결혼식들을 여러 차례 다니다 이젠 내가 형님이 된다고 남편의 동생 결혼식에 초대받았다.




시동생 결혼식에 참석하면서 나는 많은 생각을 했었다. 아마 어떻게 글을 쓰고 어떻게 기록을 남겨도 그 생각은 어느 곳에서도 온전히 남기진 못할 것 같다. 조촐하게 치르겠다는 둘의 뜻에 따라 작은 예식홀이었지만 어여쁜 꽃들이 있었고 그 둘의 이야기가 펼쳐진 곳이었다. 아빠와 엄마는 코로나로 인해 많은 사람들을 초대하지 못하는 상황이라 이러는 편이 더 좋다고 맞장구를 쳤었다. 어쨌든 나는 그 결혼식을 보며 참 많은 생각이 들었고 그날 울던 우리 아빠의 눈물과 코막힘의 소리를 들으며 어쩐지 복잡함을 느꼈던 거 같다.


아마 나도 어쩌면 아빠처럼 울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시동생의 결혼식에는 울지 않았다. 울어낼 만큼 감정의 깊이가 없었다기보다  나는 내 시댁 사람들에게서 조금 떨어진 시선으로 식을 보았기 때문에 울지 않았다. 그리고 눈물 콧물을 짜내는 아빠에게 “ 아빠가 왜 울어 ”라며 테이블에 있던 냅킨을 건네며 전혀 울 상황이 아니라는 듯이 태연하게 굴어댔다.


사실 나는 알고 있었다. 아빠가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마음이 들어 저리도 깊이 울고 계신지 말이다. 시동생은 장애인이다. 청각장애인이라 말을 하지 못하고 듣지도 못한다. 남편에 따르면 어떤 소리의 음은 들리기도 한다고 하는데 그게 어느 정도의 파장인진 알 수 없다고 했다. 처음 남편의 동생을 만났을 때 나는 눈물을 참아야만 했다. 그의 가족에겐 일상인 것을 나만 혼자 호들갑 떨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청각장애인과 맞닿아 서로를 소개하게 된 일은 없어왔기에 그날 처음 듣게 된 시동생의 목소리에 나는 퍽 가슴을 치이며 눈물이 팽 돌아버렸다. 그동안 말을 못 하는 걸로만 알고 있던 청각장애인이 내 앞에서 소리를 내었다. 이응의 발음으로 반복된 그 소리는 왜인지 나를 울컥하게 만들었다. 알 수 없고 의미 없는 응 앙 엉 같은 소리는 내는 목의 울림이 가엽게도 느껴졌고 애처롭게도 나를 때리는 것만 같아 나는 고이는 눈물을 애써 돌려내고 천연덕스럽게 웃어댔다. 그 목청이 나를 반기는 것 같아 더 울컥했다. 어머님은 처음부터 자신의 둘째 아들이 아픈 손가락이라 그 소개가 참으로 힘드셨는지 자꾸 내게 우리 모두 비장애인일 뿐이라며 장애가 없는 나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의 무리를 어쩌면 장애인보다 더 아래로 칭하는 듯한 ‘비장애인’이라는 말로 낮춰내며 몇 번이고 반복해댔다.


남편이기 이전에 남자 친구였던 그는 번번이 내게 동생 이야기를 했었다. 그 연애시절에 내게 보였던 행동이나 말 꺼냄이 모든 걸 알고 생각해보니 참 어려웠고 조심스러웠던 행동들이었나 보다. 당시 남자 친구는 카톡으로 연락을 취하는 동생의 메시지를 받으면 곧장 답장을 해댔고 동생한테 연락이 온 이야기를 줄곧 꺼내왔었다. 나는 그저 아무렇지 않게 무슨 일이 있는거냐며 급한 거면 연락을 하라고만 대답했었는데 남자 친구는 아니 톡이 와서... 라는 말만 몇 차례 하며 내 눈치를 살펴왔었다. 그러니까 자신의 동생과는 통화를 하며 연락할 수 없다는 말을 꺼내고 싶었던 것 같다. 언제고 내게 이것에 대해 말을 해야 하는데 그게 언제가 적당할지 그때를 몰라 동생에게 카톡이 온 김에 한번 넌지시 말해볼까, 아님 어째 볼까, 혼자 그렇게 고민이 있었나 보다.


다시 생각해보니 그렇게 연락이라도 올 때면_  아니, 동생 이야기가 나올 때면 주머니에서 폰을 만지작 거리며 내 얼굴을 바라보던 그의 모습이 참 생생하고 당시 눈치를 보던 지금의 내 남편이 안타깝다. 자신이 가진 결핍도 아니건만, 그리고 너와 내가 만나는 데에 어떠한 장애물도 아니건만 그는 그렇게 눈치를 보았다. 그는 그동안 그렇게 살아왔을 것이다. 집안에 장애인이 있다는 이유로, 그리고 그게 자신의 동생이라는 그것 하나만으로 왜인지 늘 주늑이 들어왔는지도 모르겠다.




 어느 날 그는 연어를 포장해 내게 왔다. 그리고 한 박스는 어제 엄마와 동생과 함께 먹어봤는데 맛있더라며 인터넷으로 주문한 연어가 이렇게 퀄리티가 좋을지 몰랐다며 나와도 함께 하기 위해 많이 주문했노라며 연분홍빛 연어살을 앞에 두고 나를 마주 보았다. 어제도 먹었는데 또 먹으면 질리는 거 아니냐는 내 말에 어제는 동생이 많이 먹어 잘 못 먹었다고 대답하더니 이내 엄마는 동생이 좋아하는 거라면 뭐든지 다 해주려 하고 동생이 잘 먹으면 자신은 손도 못 대는 경우도 많다 말한다.


그저 웃고 있는 내게 그가 또다시 내 얼굴을 이내 살펴보더니 잠시의 침묵을 깨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를 내 앞으로 꺼냈다. 사실은 내 동생이 장애인이라고. 청각장애인. 그래서 말을 못 하고 듣지 못하고, 그래서 엄마는 동생에게 유독 잘해주는 거라고 그런 것쯤은 자신은 다 이해한다고.


선분홍빛 연어가 내 눈앞에서 흐려져 보이는 것이 내 눈에 눈물이 맺힌 것이 분명했다. 


고민하고 눈치 보던 그에게 내가 건넨 첫 번째 말은 “어머니가 힘드셨겠네.”였다. 집에 아픈 사람이 있으면 그러하다. 우리 집 또한 그러했으니 그 세월 힘겨우셨음이 분명해 보였다. 남자 친구는 주춤하더니 어릴 적 동생으로 인해 놀림받던 일이나 그래도 동생이 어느 정도까지 알아들을 수 있는지도 설명한다. 내가 잘 들어주어서인진 모르겠지만 그는 조금 신난 것처럼 동생의 이야기를 떠들어댔다. 입모양을 보고 이야기를 할 수 있다거나 자신을 형이라고 부르거 싶지만 평생 형이라는 발음을 들어본 적이 없어 그런지 엉이라고 부른다는 것 그리고 엄마와 수화를 배우러 다녔던 일. 문명이 좋아진 어느 날부터 문자로 소통하고 요즘은 영상통화까지 자유로우니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데에는 문제가 전혀 없다는 그런 것들 말이다.


그리고 이내 괜찮냐고 물어보았다. 뭐가 괜찮냐는 거냐고 내가 되묻자 자신의 동생이 장애가 있어도 괜찮냐고 묻고는 그렇게 또다시 눈치를 어찌나 그렇게나 본다. 나는 그에게 내가 청각장애인을 만나는 일은 어쩌면 많은 생각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너를 만나고 있다. 동생이 그러해서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은 없지만 그로 인해 내가 괜찮아야 할 일 또한 없는 것 같은데  그래야만 하냐고 되물었다.


그는 펑펑 울었다. 그때 그가 내 앞에서 울었던 모습은 지금껏 나와 살면서도 절대로 보여 주지 않는 모습이다. 그는 장애가 있는 동생으로 인해 상처를 받아온 인생이었다. 청각장애 동생을 본 뒤로 헤어지자 말한 여자 친구도 있었고 어느 날 갑자기 쌩깐 친구도 있다고 한다. 어릴 땐 뒤에서 놀리고 앞에서 때리던 아이도 있었고 귀머거리 동생을 둔 너도 귀머거리가 아니냐며 "귀머거리"라고 크게 불러대며 병신이라 조롱받던 시절까지 그는 그렇게 내 앞에서 꺼내어 꺼이꺼이 울어냈다.


여러 번의 여자 친구가 그 이유 하나로 서서히 멀어지고 헤어지자 했을 때부터 그는 이 사실을 말하는 것이 두려웠다는 고백을 했다. 그리고 정말 비겁하게도 자신의 대학교 친구들은 자신의 잘못도 아닌 이 치부의 사실을 모르는 이가 대부분이라 말한다. 같은 동네에서 함께 부대끼며 살아오면서 집안 사정을 알게 된 어릴 적 친구가 아닌 어느 정도 자라 자신의 신변을 청산하며 보이는 모습으로 나를 꾸밀 수 있게 되었을대부터 그는 그 사실을 깊숙이도 숨기고 그 치부를 깎으며 고통스러워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늘 죄책감이 들었을 것이다.


그 마음을 왜 모를까, 나도 힘든 일을 겪어왔고 같진 않아도 아픈 사람 곁에 살아야만 했던_ 너라는 사람에 나는 공감했었다. 그러니 네가 더 좋았다. 너 또한 날 보듬어 줄 것 같았다.



맞다. 내 남편은 참 착하다. 그 성품과 참을성은 어쩌면 그런 동생을 둔 처지에서 비롯되었을지 모른다. 늘 참아왔고 비켜왔으며 먼저 나눠왔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또한 당연하다 여겨왔을 사람이다.


그리고 자신의 상처는 늘 숨겨왔을 것이다. 놀림받은 것도 당사자인 동생보다 덜한 것이라 여기고 그런 아이를 키우는 엄마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 늘 비켜서 있었을 테니 그동안의 울음을 내게 쏟아내던 날이었다. 나는 그런 남자친구에게 나에게 있어 너라는 존재를 우선시해주고 싶었다. 더 이상 비켜서지 않고 내가 너를 늘 앞세워 살아가게끔.




그렇게 우리의 결혼이 시작되었고 남편이 될 가족들에게 인사를 드리러 간 자리였다.


그런 자리에서 내가 갑자기 청각장애인이 내는 그 옹알이 같은 소리에 울컥해 눈물을 흘릴 순 없었다. 나는 시동생의 그 의미가 전달되진 못하는 자신이 여기 있노라 알리는 그 소리만으로도 왜 인지 모르게 눈물이 계속해서 고여왔지만 참아냈다. 밥을 먹으러 나가자고 나선 우리는 고깃집에 갔었고 그 자리에서 남편이 될 가족들이 청각장애인인 남편의 동생을 대하는 태도를 보며 나는 비로소 내 남편과 결혼해도 되겠다 결심했었다. 콜라가 떨어지거나 고기가 모자라면 남편은 동생을 시켰다. 네가 가서 주문해와! 네가 말하고 와! 그러면 옆에서 아버님은 그를 거들었다.


말 못 한다고 나서지 말라고 함구하거나 숨기지 않고 비장애인과 똑같이 생활하도록 이렇게든 저렇게든 해보고 그걸 해내는 시동생을 보며 그 모습이 참 좋아 보였다. 콜라를 시키러 간 예비 시동생이 손짓과 옹알이로 원하는 걸 요구할 때 당황하는 종업원들의 모습이나 이게 뭔 일인가 상황을 파악하려는 직원들의 당혹함도, 이 또한 그러려니 하는 그 시동생의 모습도 그의 가족들이 살아왔고 살아갈 모든 생활이 단번에 보여왔다.


당당히 콜라를 가져온 남편의 동생과 달리 직원들은 수군댔다. 그래도 그들은 기분 나빠하지도_ 그것이 대단한 일도 아니라는 듯 그렇게 계속해서 추가로 주문할 일이 생기면 남자친구의 동생을 나서게 만들었다.






 슬픈 일은 슬픈 일이다. 그건 겪어보지 않고 생각만 해봐도 그러하다. 그러니 겪는 사람은 오죽할까,


아빠는 사돈댁의 결혼식에 참석해 수화로 성혼 선서에 이어 혼인 성약을 다짐해 가는 모습을 보고 눈물 콧물을 이따 만큼씩 짜내셨다. 저들을 키워낸 양가 부모님 생각과 저렇게 자라나야 했던 그들 생각에 그리고 다행히도 포기 없이 이토록 잘 자라 줌에 그리고 키워냄에 그러다 서로의 짝을 만난 것에 어느 대목 하나 울지 못할 구석은 없었다.


그래도 난 울지 않았다. 내 딸아이를 돌봐야 했고 챙겨야 했고 아기가 울어서 결혼식을 심란하게 만들면 안 되는 책임도 있었지만, 나는 이미 많이 울었기 때문에 그날은 울지 않았던 것 같다. 이미 나는 그들을 생각하고 겪으며 계속 울어왔었다. 그래서 그날만큼은 눈물도 나오지 않았고 울고 싶지도 않았다.


수많은 친구들을 불러 우리 이렇게 함께 한다며 축복을 받아내는 그 무리들 또한 청각장애인들이었지만 아무리 힘들었을 그들의 생각에 나는 울지 않으려 애썼다. 각자의 자리에서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자신의 몫을 해내 온 그들에게 나는 그 시간을 축제로 즐기게 하고 싶었다.



아빠 엄마는 신부를 보며 저 친구는 어찌 말을 하냐고 물어왔다. 그 질문에 나는 그녀는 와우관 수술을 해서 듣고 말을 할 수 있노라 설명했다. 단 너무 큰소리는 울려서 못 알아듣고 시끄러운 곳에서는 머리가 아파 오히려 안 들으려 이어폰을 끼기도 한다 알려드렸다. 모든 청각장애인이 와우관 수술을 할 순 없지만 그래도 할 수만 있다면 들을 수 있는 세상이 좋지 않겠냐고도 덧붙였다. 아빠는 축하한다 직접 전해주고 싶은데 듣지 못해 어찌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찰나 그날의 신부가 다가가 “와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을 직접 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 목소리에 아빠는 또 한 번 감동을 받았더랬다. 그리고 시동생이 나의 엄마 아빠를 알아보고 손짓으로 설명을 하더니 함께 사진을 찍자 권했고 아빠 엄마는 예의를 갖춰 축하해주러 온 발걸음에 주인공들과 직접 담소를 나눠 참 좋았다는 그 일화를 쏟아내신다.


부족하게 태어난 자식이 자신 탓만 같은 그 심정을 나의 부모님도 가지고 계신다. 그래서 아빠와 엄마는 그 결혼식장에서 그리 눈물을 흘려보내셨을 것이다. 그 부족함을 메우려 얼마나 노력했을까, 그래서 함께 키워내는 자식에겐 또 얼마나 미안했을까. 보이는 결핍이든 그렇지 않던 아픈 자식은 참 속 쓰리다. 나와 내 남편은 그런 가족을 옆에 두고 자라왔다. 어쨌든 남편은 보여서 더 놀림받았고 난 보이지 않아 속앓이를 더 해왔었다.




아빠는 그렇게도 내 생각이 났으며 양가 부모님의 지켜보진 않았던 그 모든 세월에 감정이 내비쳐 버렸노라 말씀하신다. 난 그런 아빠가 그리고 엄마가 좋다. 아빠 엄마와 살 부딪치며 살아간 세월은 어쩌면 내 인생의 반도 아니 되지만_ 나는 내 부모님의 마음과 생각이 보인다.

 













시동생 부부는 잘 살고 있다.

자주 보지 않는다.








그래도 잘 산다고 확신하는 이유는

신혼생활을 소꿉놀이처럼 하고 있는 듯한

카톡 프로필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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