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평씨의 하루 3

변화

by 하이진

희미한 소음. 귓속에 면솜 같은 것이 들어 있는 듯, 모든 소리가 멀었다. 눈꺼풀을 들어 올리는 일이, 어둠을 견디는 것보다 더 힘들었다. 그가 겨우 눈을 떴을 때, 하얀 천과 형광등이 보였다. 병원. 곁에서 아내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눈가가 벌겋게 부어 있었고, 머리카락이 마치 잠깐 바람을 맞다 들어온 사람처럼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정신 들어?”


그녀가 낮게 물었다.


“독감이래."


간호사가 기록을 쓰고 있는 모습. 창문 틈으로 봄 햇살이 얇게 스며들어 커튼에 거품 같은 무늬를 남긴다.


“나… 출근했었지.”


그의 목소리는 자신의 것이 아닌 것처럼 들렸다.


“회사에서 연락 와서, 집 근처 병원으로 왔어.”


아내가 컵을 들어 스트로를 그의 입술에 가져다 댄다. 물이 입안으로 들어온다. 물은 레몬 냄새가 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상하게도 혀끝에 레몬의 새콤한 향이 스쳤다.


“고마워.”


그가 중얼거렸다. 아내가 그를 바라본다.


“무슨 꿈꿨어?”


“아니.”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그는 창문을 가리켰다.


“창문 좀 열어줄래?”


아내가 창문을 조금 연다. 공기가 들어온다. 아직 차갑지만, 그 속에 봄의 미세한 풀 냄새 같은 것이 섞여 있었다. 문득 그는 길가의 개나리가 떠올랐다. 어제보다 더 피어났을 것이다. 그는 그걸 보지 못했다. 아니, 보았지만 ‘같다’고 생각하며 지나쳤다. 창밖으로 구름 한 점이 천천히 움직인다. 아주 천천히, 그러나 분명히.


그날 오후 그는 집으로 돌아왔다. 체온은 조금씩 내려가고 있었다. 이불속에서 그는 한동안 눈을 감았다 뜨기를 반복했다. 자는 게 두려웠다. 다시 어둠 속으로 떨어질까 봐. 그러다 문득, 사무실 책상 밑에 둔 주전자가 떠올랐다. 정말 거기에 있을까. 누군가 발견했을까. 그는 스스로에게 웃음이 났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말도 안 되는 일이, 그의 가슴 어딘가를 조용히 두드렸다.


다음 날 아침, 그는 조금 일찍 눈을 떴다. 아직 여섯 시 사십오 분이 되지 않았다. 시계의 분침이 숫자 사이를 더디게 기어갔다. 그는 베란다 문을 열고 바깥공기를 들이마셨다. 먼 데서 택배 트럭의 백업음이 들리고, 어디선가 라디오의 진행자가 날씨를 이야기했다. 그는 주방으로 가 물을 데웠다. 주전자에서 김이 올라왔다. ‘주전자.’ 그는 웃음이 났다. 주방의 주전자는 요술램프처럼 반들거리지도 않았고, 주둥이는 위로 들려 있지도 않았다. 그러나 물은 똑같이 끓었고, 김은 똑같이 하얬다.


아내가 부스스한 머리로 나왔다.


“오늘은 밥 먹고 가.”


그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식탁에 앉았다. 아내가 식탁 위에 계란프라이 두 개와 김치를 올려놓았다. 노른자가 반쯤 익어 있었다. 그는 젓가락으로 노른자를 건드렸다. 노란 물이 흘러나왔다. 그 색이 이상하게 생생했다. 그는 밥을 한 숟갈 뜨고, 김에 싸서 입에 넣었다. 밥알이 혀에서 흩어지며 작은 별처럼 터졌다.


“맛있네.”


그가 말했다. 아내가 그를 잠깐 봤다.


“그냥 계란인데.”


“그래도.”


그는 밥을 다 먹고 나왔다. 엘리베이터는 오늘따라 빨리 내려왔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거울 속의 자신을 봤다. 어제의 자신과 똑같았다. 그러나 똑같지 않았다. 눈가의 주름이 조금 더 분명하게 느껴졌다. 그것은 나이가 들어서 생긴 것이라기보다, 오래전부터 있었던 것을 이제야 본 것 같았다.


골목의 개나리가 한껏 피어 있었다. 꽃잎의 가장자리가 어제보다 더 얇았다. 바람이 살짝 지나가자 꽃잎이 가볍게 떨렸다. 그는 잠깐 멈춰 섰다. 걸음을 멈추는 일은 그에게 드문 일이었다. 그는 손을 뻗어 꽃잎 하나를 살짝 건드렸다. 꽃잎이 손끝에서 부서지지 않고, 오히려 손끝의 온도를 잠깐 흡수했다가 돌려주었다.


모퉁이에서 어제의 노인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멀리서 빵집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셔터 올라가는 쇳소리, 카드 단말기 부팅음, 누군가의 하품. 그는 지갑에서 천 원짜리 두 장을 꺼내 바지 주머니에 옮겨 넣었다. ‘다음에 만나면.’ 그렇게 생각했다. 길을 건너려 할 때, 누군가 뒤에서 말을 걸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감사씨였다. 출근길에 우연히 마주친 모양이었다. 감사씨는 한 손에 작은 텀블러를 들고 있었다.


“날씨 좋네요. 개나리도 예쁘고.”


그는 순간 웃음이 났다.


“그러게요. 오늘은 진짜 예쁘네요.”


감사씨가 의아하다는 듯 그를 보더니, 함께 걸었다.


“어제 걱정했어요. 병원 다녀오셨다면서요.”


“응. 독감.”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살아났어요.”


회사에 도착하자, 책상 위에는 여전히 서류의 산이 있었다. 그는 한숨 대신 의자를 잡아당겼다. 의자 바퀴가 또 비명을 질렀다. 그는 의자의 철제 축에 손가락을 갖다 대보았다. 거기에는 묵은 먼지가 끼어 있었다. ‘이것도 기름 좀 발라야겠네.’ 그는 마음속으로 메모를 했다.


책상 밑을 슬쩍 봤다. 어제의 주전자가 있었다. 반들거리는 표면은 여전히 사무실의 먼지와 빛을 천천히 빨아들였다. 그는 잠깐 주저하다가 주전자를 꺼내, 책상 한쪽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옷소매로 아주 가볍게 문질렀다. 금속이 소리를 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이번엔 웃음이 났다.


‘그럼 그렇지.’


그는 모니터를 켰다. 표의 숫자들이 다시 사각형 칸 안에서 조용히 줄을 섰다. 그는 커서를 움직여 첫 셀을 눌렀다. 숫자를 입력하고, 다음 셀로 넘어가며, 숨을 쉬었다. 숨이 들어오고 나갔다. 그의 가슴 안쪽에 아주 작은 빈방 같은 것이 생긴 것 같았다. 그 방은 아무 장식도 없고,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냄새도 없었다. 그러나 그 빈방은 그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하루의 처음으로.


점심시간, 그는 감사씨와 함께 식당에 갔다. 감사씨가 말했다.


“오늘은 순댓국 어때요? 속도 풀릴 겸.”


“좋지.”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순댓국의 김이 얼굴을 덮었다. 그는 고춧가루를 한 숟갈 덜어 넣었다가, 잠깐 멈추고 반만 넣었다. 그 정도가 좋을 것 같았다. 순대의 따뜻한 탄력이 이로 전해졌다. 그는 국물을 마셔, 속이 풀리는 느낌을 확인했다.


“오늘 표 정리, 제가 조금 도울게요.”


감사씨가 말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냐. 할 수 있어.” 그리고 잠깐, 덧붙였다. “고마워.”


오후, 그는 서류를 넘기다 말고 잠깐 창밖을 봤다. 바람이 장난치는 듯 블라인드를 건드렸다. 그림자가 책상 위로 흘러왔다 사라졌다. 전화가 울렸다. 그는 받았다. 반대편에서 누군가 다급하게 말했다. 숫자 하나가 잘못 입력됐다고. 그는 “알겠습니다”라고 말하고, 다시 표로 돌아갔다. 그의 손목이 가볍게 움직였다. 숫자가 자리로 돌아갔다.


퇴근길, 골목 모퉁이에 노인이 있었다. 오늘은 햇빛이 좋아 보였다. 노인의 손등 위의 핏줄이 얇게 떠올라 있었다. 그는 멈추어 섰다. 주머니에서 천 원짜리 두 장을 꺼내 노인의 손에 쥐여주었다. 노인이 그를 올려다봤다.


“고맙네, 젊은 양반.”


그는 말했다.


“저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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