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 내림

by 정글


"여보! 빨리 챙겨라, 일출 보러 가자!"


새벽 6시. 아내가 재촉했다. 팔순이 넘은 처형과 조카들과 함께하는 제주 여행 사흘째 날 아침이다. 장모님이 일찍 하늘나라로 가신 후, 처형은 내게 장모님이나 다름없었다. 그분을 모시고 떠난 이번 여행은 그래서 더 특별했다.

대충 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서자 새벽 공기가 입안 가득 퍼졌다. 역시 제주 공기는 다르네요. 조카 댁이 깊은숨을 들이마시고 내뱉으며 한마디 했다.


우리는 성산일출봉 인근 '광치기 해변'으로 차를 몰았다. 하늘에는 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다. 해를 볼 수 있기를 속으로 기도했다.


15분쯤 달려 도착한 주차장은 이미 차들로 빼곡했다. 많은 이들이 차 안에서 해돋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차에서 내려 모래사장을 지나 갯바위 위로 걸어갔다. 바람이 차가웠지만 발걸음은 가벼웠다.


파도가 쉴 새 없이 밀려와 바위에 부딪혀 부서졌다. 철썩, 철썩!. 갈매기 한 쌍이 우리 앞을 유유히 지나갔다. 바다 짠 내음이 코를 자극했다. 11시 방향에는 성산 일출봉이 성처럼 우뚝 서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조카는 카메라 삼각대를 세우며 중얼거렸다. "태양이 뜰까요?" 나는 태양이 안 나와도 괜찮아 이 순간 경치만 느끼고 가도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속으로 기도했다. 해님을 어렴풋이 나마 볼 수 있기를!

나는 휴대폰 카메라로 구름 낀 하늘도, 출렁이는 바다도, 옆에 선 아내와 친척들의 모습도 모두 담았다.


그때였다.


구름 위로 붉은빛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마치 누군가 하늘 뒤에서 천천히 불을 켜는 것 같았다. 주위가 점점 밝아지더니, 손주의 빨간 혀처럼 붉은 오렌지빛 태양이 모습을 드러냈다.

"와!"

여기저기서 탄성이 울렸다.


반원에서 완전한 원으로. 태양은 순식간에 수평선을 벗어났다. 그리고 얼마 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태양이 구름 속으로 들어가더니, 사방으로 빛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수천 개의 빛기둥이 하늘에서 땅으로, 바다로, 우리를 향해 쏟아졌다. 마치 하늘이 갈라지며 천지창조 같은 기이한 장면이 연출되었다.


"세상에..." 아내와 조카가 탄성을 질렀다.


사진을 찍다 말고 나는 카메라를 내려놓았다. 이 순간만큼은 렌즈가 아닌 내 눈으로, 내 가슴으로 느끼고 싶었다. 태양은 구름 속을 드나들며 시시각각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빛의 연출은 마치 불꽃놀이처럼 화려했고, 경건했고, 압도적이었다.

두 팔을 벌렸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찬송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옆에 선 아내가 내 손을 꼭 잡았다.


우리는 한동안 이 광경을 온몸으로 받았다.


"오늘 하루 구경 다 했다. 이제 자러 가자. 이런 일출은 처음이야!"


조카의 너스레에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차에 올라탔다. 그런데 시동을 거는 순간, 다시 한번 하늘이 변했다. 구름 사이로 쏟아지는 빛 내림이 지금까지 본 것 중 가장 장엄했다.


잠깐만! 조카가 카메라를 들고 급히 차에서 뛰어내렸다. 하지만 이미 그 장면은 변하고 있었다. 자연의 선물은 기다려주지 않았다. 조카는 아쉬워했다. 나도 그랬다. 하지만 마음 만은 감동으로 충만했다.


숙소로 돌아 오는 차 안은 고요했지만 내 가슴에는 아직도 그 빛이 출렁이고 있었다. 친지들 얼굴에도 붉은빛이 묻어있었다. 창밖으로 이제는 평범해진 태양이 보였다. 구름 위로 높이 떠올라 제주의 아침을 밝히고 있었다. 그 화려했던 순간은 지나갔지만, 태양은 여전히 묵묵히 제 할 일을 하고 있었다.

숙소에서 아침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올레길 1코스(말미오름)를 가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처형이 제주 하늘을 보며 두팔을 위로 치켜들고 크게 심호흡하며 말했다.

"참 좋다!"


그 짧은 말속에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태양은 떠오른다. 같은 태양이지만 우리에게 주는 감동은 매번 다르다. 오늘 본 태양은 오늘로 끝이다. 똑같은 해돋이는 평생 단 한 번뿐이다.


그 황홀했던 빛 내림도 시간이 지나자 일상의 태양이 되어 조용히 하늘을 가로질러 서쪽 하늘로 사라졌다. 우리 삶도 그렇다. 아무리 화려하고 빛나는 순간을 살더라도 결국 우리 모두는 생을 마감한다.


중요한 건 얼마나 오래, 얼마나 높이 빛났느냐가 아니다. 누군가의 삶에 빛 내림이 되어주었는가. 누군가에게 '참 좋다'는 한마디를 건네게 만들었는가 하는 거다.


오늘도 태양은 묵묵히 떠올랐다. 처음엔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다가, 어느 순간 사방으로 빛을 쏟아내고, 이내 일상의 태양이 되어 하늘을 건넜다.


우리도 그렇게 살면 된다. 사부작사부작 하루를 시작해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누군가의 마음에 작은 빛의 흔적을 남기는 삶.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하루다. 그렇게 살다가 생을 마감할 수 있다면, 그것은 값어치 있는 삶이다.

오늘도 나는 기도한다. 오늘 하루, 누군가의 삶에 작은 빛 내림이 되기를. 광치기 해변의 그 아침처럼, 잠시라도 누군가의 가슴을 환하게 밝히는 사람이 되기를.


오늘! 누군가의 태양이 되시길!


오늘도 최고로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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