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장 난 아이패드, 죽음의 길목에서

내가 이 땅에 왜 왔는지? 뭘 남기고 가야 하나.

by 정글

“인자 오데 가볼 데도 없습니다.

어차피 죽을 아면 여서 직이든 살리든 알아서 하이소."


엄마는 다섯 살 된 나를 버리다시피 병원에 두고 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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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패드 전원을 켰다. 아래 같은 그림이 나왔다. 전원 버튼을 켜고 꺼기를 몇 번 반복했지만 마찬가지였다. 얼마 전 지인이 아이패드가 먹통이 되어 애플 서비스센터 문의했더니 손상된 부품을 바꾸려면 70만 원이 든다는 말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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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 서비스센터 080-333-4000번으로 전화했다. 노트북과 아이패드를 연결해서 복구를 시도했다. 업그레이드, 복원 버튼을 연달아 누렀다. 복원 진행, 업그레이드 진행.....,


서비스 센터 직원의 지시에 따라 수차례 복구 시도했지만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아이패드로 긴급히 처리할 일이 있는 데 답답했다. 집으로 오는 버스 안에서도 온통 아이패드 생각뿐이었다. 설마 안에 있는 자료가 없어지는 건 아니겠지? 집에 와서 다시 애플 서비스센터에 연락했다. 혹여 응대하는 직원의 성향이나 능력에 따라 수리할 수 있을 가능성을 기대하며. 역시 마찬가지였다. 서비스센터에 가 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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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줌 수업할 때도 아이패드가 필요한 데 노트에 필기하며 수업할 수밖에 없었다. 정리된 자료를 수강생에게 전해야 하는 데 그것도 할 수 없어 양해를 구했다.


또다시 아이패드 부팅 버튼을 길게 누렀다가 켜기를 반복했다. 화면에 위와 같은 그림만 나오다. 아이패드를 들어 바닥에 내동댕이치려고 들었다가 침대 위로 던져버렸다.


펄펄 끓는 라면 냄비에 땡초 3개를 썰어 넣었다. 단숨에 먹었다. 입안이 얼럴럴 땀이 났다.

방금 도착한 이기섭 작가가 쓴 《닥터 피터슨의 특별한 처방전》책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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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첫 부분, <천사를 본 소년> 주인공은 독서모임과 글쓰기 수업에서 처음 만났던 이지연 작가다. 그저께 만나 함께 차를 마시며 이 책을 소개받게 되었다. 작가가 5살 때 죽음의 문턱에서 다시 살아난 이야기가 있어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이 아는 올해 몬 넘긴다. 곧 죽을 아다."


용하다는 점쟁이가 딱하다는 듯 말했다. 마을 노래자랑대회에 나갈 만큼 노래를 잘 부르고, 건강해서 훌라후프도 잘 돌리던 어린 지연이가 척추결핵에 걸린 것은 다섯 살 때였다.


"니 걷는 기와 그렇노?"


엄마 손을 잡고 시장 가는 길에 지연이가 절룩거리며 걷는 것을 본 엄마는 깜짝 놀랐다. 바로 병원으로 가 엑스레이를 찍었다. 의사는 큰 병원으로 가라고 했다.


“퍼뜩 수술 안 하모 평생 꼽추로 살아야 합니더." !


부산의 큰 병원에서 수술했지만, 전신마비가 와버렸다. 엄마는 매일 아침 누워만 있는 지연이의 허벅지와 손등을 꼬집었다. 혹시 밤새 기적이 일어나 감각이 돌아오길 기대했지만, 지연이는 여전히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야야, 제발 아프다꼬 쫌 해봐라."


엄마는 딸을 붙들고 하염없이 울었다. 어차피 사람답게 못 살 거면 엄마랑 같이 죽자고 했다. 하지만 어린 지연은 살고 싶었다.


누군가 여수 애양병원에 소아마비를 고치는 유명한 미국 의사가 있다고 해서 여수까지 갔다. 그 의사는 꼼꼼하게 살펴보더니 마산에 있는 소아결핵병동 닥터 패티슨을 소개했다.


"이 병은 거기 의사가 젤 잘 봅니다."


엄마는 지연을 업고 마산 가포 골짜기에 있는 병원으로 갔다. 자갈이 넓게 깔린 병원 마당을 지나 갈색 머리에 파란 눈의 의사를 만났다. 그 역시 고개를 저었다. 마지막 희망까지 사라진 엄마는 지연을 병원에 버리다시피 놔두고 갔다.


“인자 오데 가볼 데도 없습니다. 어차피 죽을 아면 여서 직이든 살리든 알아서 하이소."

그 병원에는 그렇게 들어온 아이들이 50명쯤 있었다.


"지연아, 오늘 어떤가 선생님이 함 보까?"


아침마다 회진하는 의사 선생님은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며 진찰했다. 다섯 살 척추결핵 환자 지연이는 전신마비라 아무 감각도 없는데 선생님은 품 안에서 따뜻하게 덥힌 손으로 다리와 발바닥을 만져주었다. 이곳은 그동안 지연이 다녔던 다른 병원과 달랐다. 의사 선생님은 다정하고, 간호사 언니는 밥도 먹여주고 링거줄로 장미꽃 반지를 만들어 끼워주었다. 같은 병실 언니 오빠들은 지연이에게 한글과 구구단을 가르쳐주고 성경을 읽었다.


지연이 병원에 입원한 지 몇 달이 지났다. 처음엔 손가락이 조금씩 움직이고, 그다음엔 발가락이 움직였다. 드디어 침대를 붙들고 일어설 수


있게 되자 지연이는 무거운 자갈이 든 주머니를 차고 한 걸음 한 걸음 걸었다. 감각이 돌아온 발바닥은 디딜 때마다 바늘로 찌르듯 아팠다.


병원 물리치료사인 이종섭 선생은 매달 엄마에게 지연의 상태를 엽서에 써서 보내주었다. 이 선생도 소년 시절 척추결핵을 앓아 키가 작고 등뒤가 솟아 있었다.


“이제 지연이는 마비가 풀리고 다시 걷게 되었습니다."

20180630_204419.jpg?type=w966 왼쪽이 주인고 이지연 작가

엽서를 받은 엄마는 하얀 실내화를 사 들고 병원으로 한걸음에 달려왔다. 기적 같은 일이었다. 업혀서 병동에 들어온 지연이는 거의 2년 만에 두 발로 걸어 퇴원했다. 병원비는 무료였다.


죽을 줄 알았던 아이가 살아왔다고 동네가 떠들썩했다. 퇴원 후에도 지연이는 정기적으로 패티슨에게 진찰을 받았다. 건강해져 초등학교에 들어간 지연이는 피아노를 잘 쳐 콩쿠르에도 나갔고 배구선수로도 뛰었다. 툭하면 점보고 굿하던 엄마는 더 이상 미신에 마음을 두지 않았다. 교회에 가본 적도 없는 엄마는 지연에게 이렇게 말했다.


"니 병은 예수님이 나사주신 기다."


한국 이름 배도선, 닥터 패티슨은 1937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나 케임브리지 대학 시절 예수를 인격적으로 만나 인생이 바뀌었다. 신앙 때문에 부모와 갈등으로 절연당하는 아픔 속에서도 그는 의사가 되어 소외된 이웃을 섬기겠다는 소명을 붙들게 된다.


1966년 한국에 처음 왔다. 국립마산병원 소아결핵병동으로. 15년간 척추결핵으로 장애를 겪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헌신으로 돌보며 복음을 전하며 새 삶을 선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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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피터 패터슨이 한국에 오지 않았다면, 이지연 작가는 세상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지연 작가는 그를 통해 하나님 사랑을 알았다. 어머니와 함께 신실하게 하나님을 믿으며 생명의 말씀을 이웃에게 전하는 삶을 살고 있다.



닥터 피터슨은 신앙 때문에 부모와 절연당했다. 학비 지원이 끊겨 온갖 굳은 일을 다하면서 의학 공부를 마쳤다.



"나는 가난한 나라에 의료선교를 가야 한다"라는


소명을 붙들고 한국의료선교사로 와서 헌신했다.


꼴랑 아이패드 고장으로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쪼잔한 나를 보며 내가 이 땅에 온 목적이 무엇인지 생각해 봤다. 내 삶의 목적이 뚜렷하면 주변의 험담이나 사소한 일들은 곁가지나 흙먼지에 불과하다는 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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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일로 다투고, 질투하고, 원망하며 일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고 짜증 내는 쪼잔한 나를 본다.


오늘 아침 아파트에 떨어져 있는 낙엽을 한동안 쳐다봤다. 올해가 저물고 있다. 내 삶이 다 지기 전에 제대로 살고 있는지 내 소명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요량이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니 아니하리라"(창세기 28:15)


"주여, 당신의 일을 마친 후 우리를 평안히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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