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야, 엄마가 너무 아파 좀 와 줄래?”
36년 전, 그날의 전화벨 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맴돈다.
아내의 다급한 목소리에 달려간 그곳에서, 예비 장모님을 처음 만났다. 덩치가 아내 두 배는 되어 보였다. 장모님을 업고 2층 계단을 내려오는 데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그 길로 입원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장모님은 하늘나라 장인어른 곁으로 가셨다.
그 후로 명절이면 큰 처형 댁으로 갔다. 장모님과 장인어른이 계시지 않는 빈자리를, 처형과 동서는 사랑으로 채워주셨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기억했다가 갈 때마다 준비해 주셨다. 안타갑게 동서도 교통사고로 장모님 곁으로 가셨다.
1박 2일 예정으로 포항 처형 댁에 방문했다. 겨울 햇살이 단체로 마실 와서 베란다 화초들과 도란도란 이야기하고 있었다. 싱싱하고 반짝반짝 빛나는 화초들을 보니 처형의 정성이 느껴졌다. 외로움을 달랜 흔적이다. 작년 팔순잔치를 했었다.
“정서방, 어서 와서 옻닭 먹게”
정서방 좋아하는 옻닭 삶았다며 큰 들통을 들고 와서 국물을 내 앞에 떠 주신다. 토종 닭 두 마리를 장만했다고. 흐물흐물해진 닭살을 뜯어 내 국물 위에 얹어주었다. 큰 인삼 한 뿌리도 함께. 다른 사람들 눈치는 아랑곳하지 않고 나만 챙긴다. 구수하고 감칠맛 나는 옻닭 국물과 닭살을 허겁지겁 해치웠다.
“정서방 좋아하는 도토리묵이네, 먹어보게”
예전에 도토리묵 좋아한다고 한마디 했던 걸 잊지 않고 갈 때마다 도토리묵을 상에 내놓았다. 팔순 나이, 관절도 좋지 않은 데 이산 저산 다니면 도토리를 줍는 처형 생각이 났다. 양념을 묵에 듬뿍 쳐서 한 숟가락 입속에 넣었다. 텁텁 달콤 감칠 한 맛!. 그래 이 맛이야, 장모님(처형) 손맛!
점심시간 팥을 삶았다. 팥을 삶아 걸러내고 팥 칼국수를 끓였다. 내가 팥 칼국수를 좋아하는 걸 또 어떻게 아시는지.
“정서방 그릇 대 보소”
“괜찮습니다, 이거면 됐...,”
말이 끝나기가 전에 칼국수가 든 냄비를 들고 와 다시 한 그릇 채웠다. 두 그릇을 위장 안으로 쏟아부었다. 처형 집만 오면 위장이 늘어나는 고난사가 시작된다.
원고 교정작업, 강의안 작성, 독서모임 준비 등 마음이 바쁘지만, 하루 더 있기로 했다. 2박 3일이 금방 지났다. 아침을 늦게 먹어 점심은 간식 겸 김밥을 먹었다. 오후 한 시. 집으로 오려는 데 좀 있다가 남은 옻닭 다 먹고 가라고 소매를 잡아끈다.
점심 먹은 지 채 두시도 지나지 않았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옻닭 국물과 잡곡밥을 차려왔다. ‘추운 데 따끈따끈한 국물 먹고 가면 좋다’며 한상 차려왔다. 정말이지 이제 배가 부르다 못해 아프다. 그래도 처형의 정이 듬뿍 담긴 옻닭 국물을 후루룩후루룩 들이켰다.
처형 집을 나설 때, 갓 담은 김치통, 도토리묵이 든 비닐 등 한 아름 음식을 안겨주신다.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처형 모습이 백미러에서 보이지 않을 때까지 보았다.
“여보, 처형 돌아가시면 형제들 안 모이겠재?”
아내는 오래오래 살아야 할 텐데...,라며 말꼬리를 흐렸다.
"정서방 퇴직도 했는데, 포항으로 이사 오지!"라고 하시던 말씀이 자꾸만 마음에 맴돌았다. 텅 빈 아파트에 홀로 앉아 있을 처형 생각에 마음이 아린다. 고속도로를 달리던 차도 발걸음이 무거운지 더디더디 간다. 어떤 때는 도로가 안방인 양 드러누워버린다. 처형의 세월도 이처럼 천천히, 더디더디 갔으면 좋겠다.
'사위는 백년손님'이라지만, 나는 이미 오래전에 손님이 아닌 아들이 된 것 같다. 처형 집에 가면 아이처럼 마냥 즐겁다. 그곳에는 장모님의 사랑이 그대로 이어져 흐르고 있음에 틀림없다. 어쩌면 이것이 인생이고 내 운명인지도 모른다.
철학자 니체 명언 중 '아모르파티 Amor fati[운명애(運命愛)]'라는 것이 있다. "자신의 운명을 사랑해라. 그것이 인생이다"라고.
장모님을 통해 아내를 만나고, 처형을 만났다. 그리고 아들을 낳고, 할아버지가 됐다. 나는 우연이 이 땅에 온 것이 아니다. 누군가에 의해 운명처럼 이 땅에 왔고, 인연이 되었다. 내가 나인 이유는 내 곁에 소중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운명은 인연에게 베풀어야 할 상처가 아닌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이다.
“아들처럼, 동생처럼, 때론 어머니처럼 챙겨주시는 그 마음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사랑하고 감사합니다.”
"아모르파티(Amor fat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