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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 띠동갑 사랑

by 정글


아들 집 둘째 날 아침. 손자의 부스스한 머리가 내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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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잠에서 덜 깬 눈을 비비며 "할비, 할비..." 하고 구시렁거리는 모습에 내 마음이 따스해졌다. 아직 말이 서툴러 '할아버지'를 '할비'라고 부르는 어눌함이 사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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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락 안아 올리자 까르르 웃음이 터진다. 손자와 나는 띠동갑, 정확히 60년 차이의 범띠 사이. 그의 웃음소리가 내 가슴에 스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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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를 바라보며 문득 과거가 떠올랐다. 내 아들이 저만했을 때, 나는 어땠을까.

"아빠, 제발 공차러 가자고."

그때 내 팔을 잡아끌던 아들의 눈빛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그 눈빛 속에 담긴 간절함을 무시하고 "친구들하고 놀아라"라며 현관 밖으로 내보냈던 기억. 주말마다 직장 상사와 동료들과 술자리를 핑계 삼아 집을 비웠고, 모처럼 집에 있는 날이면 모자란 잠을 채우기 바빴다.



"아빠, 친구들은 아빠하고 논단 말이야."



그 말을 듣고도 아들을 밖으로 내 보내며 문을 닫고 잠을 청했다. 이제 와서 돌이켜보니, 술잔 속에 담긴 것은 즐거움이 아니라 내 아이, 내 가정의 시간이었다.


손자는 에스키모 모자를 쓰고 눈썰매를 타며 즐거워한다. 아들은 내게 아빠가 되어주지 못했던 모든 순간들을 자신의 아이에게 채워주고 있다. 늦게나마 깨달은 내 잘못을 아들은 돌연변이처럼 정반대로 실천하고 있다. 아파트 주변에서 눈썰매를 끌어주는 모습, 들로 산으로 함께 놀러 다니는 사진들이 내 휴대폰을 가득 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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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아침, 교회에 가자고 했다. 만삭인 며느리에게 미안했지만, 아들 가족이 신앙 안에서 행복했으면 하는 간절함이 있었다. 거금을 보태 차도 사주었다. 마음은 싱겁겠지만, 시부모를 거역할 수 없어 따라나선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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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 이룸 교회 앞에서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예배를 드리며 묵묵히 기도했다. 아들 가족이 하나님을 잘 믿을 수 있도록, 며느리가 출산을 잘할 수 있도록, 모두가 건강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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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물칼국수를 먹고, 스타벅스 차를 마시고, 출산용품을 사는 동안 내내 마음 한편에는 간절함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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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이 나와 같은 사람이 아니라, 신앙생활 잘하고 가정을 잘 양육할 수 있는 사람이기를. 나중에 내 나이가 되어 내가 지금 느끼는 것과 같은 후회를 하지 않기를.


"으윽!" 손자의 장난감 화살에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진다. 손자는 깔깔거리며 날 다시 일으킨다. 아직 화살을 쏘지도 않았는데 왜 쓰러지냐고 구시렁거린다. 며느리가 통역이 필요한 그 말소리가 얼마나 귀여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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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에 지친 손자는 잠이 들었다. 머리끝에 맺힌 땀방울, 발그레 달아오른 양볼. 이 순간을 내 아들과도 나눴어야 했는데.


아들 부부가 무알코올 맥주와 치킨을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날개를 좋아하는 나는 날개 부위를 다 먹어치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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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치킨 통을 뒤져기다가 나를 째려보며 한마디 한다.

"당신은 맨날 좋아하는 부위만 먹더라."

아내의 잔소리에 아들이 웃으며 말한다.

"엄마, 다음에는 날개만 있는 닭 시킬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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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삭으로 힘겹게 앉아있는 며느리를 보며 "나라야, 다리 쭉 펴라~" 했다. 며느리가 양 다리를 쭉 폈다. 10일 후면 세상에 나올 손녀 '이레'가 할아버지에게 엄지척하며 웃고 있는 것만 같았다.


60년 세월이 흘러 손자와 나는 범띠 띠동갑이다. 아내와 며느리는 뱀띠 띠동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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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때로 우리에게 두 번째 기회를 준다. 내게는 손자와 곧 태어날 손녀가 그 기회다. 아들에게 해주지 못했던 모든 것을 손자, 손녀에게 해주며 채워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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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결국 함께하는 시간이란 걸 이제야 깨달았다. 술잔을 기울이며 흘려보낸 시간들, 아들의 손을 잡아주지 못한 순간들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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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지금이라도 손자의 손을 잡고, 곧 태어날 손녀의 작은 손가락을 붙잡을 수 있어 감사하다.


내 아들은 다행히 나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다. 손자에게 온전한 아버지가 되어주고 있다. 어쩌면 그것이 내 인생 최고의 성공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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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가정이 신앙 안에서 더욱 단단해지고, 손주들이 건강하게 자라는 것. 그 여정에 내가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 것이 내 기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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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청춘처럼 아들이 어릴 때 아버지로 다시 살아가려고 애쓴다. 세월을 되돌릴 수은 없지만, 진정한 부성애란 무엇인지, 그리고 그 사랑을 표현하는 데 늦은 때란 없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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