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이란 사람의 처지로서는
'이만하면'이란 말은 있을 수 없다.
-김수영
은유 작가. 《쓰기의 말들》. 필사. @71.P163.
글을 쓰기 전 몇 번씩 떠오르는 말이 있다.
'일단 쓰자!' 맞는 말이다.
생각만 하고 쓰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쓴다. 허겁지겁 주제를 정하고,
메시지 짜고, 독자에게 어떤 도움이 될까 생각해 본다.
토닥토닥 한 문장 글을 써 내려간다.
글 한 편이 작성됐다.
그런데 시계를 보니 블로그 마무리 시간이 돼 간다.
(내가 정한 시간, 1시간 30분)
엉덩이가 들썩들썩, 마음은 싱숭생숭,
눈은 가물가물 얼른 노트북을 닫고 싶다.
에너지가 달린다.
맞춤법 검사기를 돌린다.
어째 마음에 들지 않는다.
관련된 이미지를 찾아 문장 사이에
슬며시 끼워 넣는다.
'이만하면 됐다..., '
블로그 발행 버튼을 누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거실에 있던 아내가 부른다.
"여보, 오타 있다. 말이 안 되는 것도 있고,
문장이 이상해. 글 쓰는 코치라는
사람이 그래 되겠나?"
가슴이 철렁한다. 다시 블로그를 연다.
그제야 보인다. 어색한 문장, 엉킨 표현들, 오타.
'진작 한 번만 더 봤더라면..., '
글을 다시 고친다. 천천히 숨을 고르며.
글을 고치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다.
특히 열심히 쓴 글일수록 더 고치기 싫다.
지워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지우는 건
애써 쌓아 올린 탑을 허무는 것 같다.
다듬지 않는 글은, 마치 원석과 같다.
울퉁불퉁 표면이 거칠고 불순물이 끼어 있다.
불필요한 조사, 접속사,
중복되는 표현, 비약적인 단어......,
글은 '웬만하면' 한 번 더 다듬는 게 좋다는 걸
알면서도 고치는 건 고역이다.
김수영은 "문학하는 사람에게
'이만하면'이란 말은 있을 수 없다."라고 말했다.
퇴고란, 이미 쓴 글을 낯선 눈으로
독자의 시선으로 읽고,
이 문장이 정말 필요한가?
더 짧고 간결하게 바꿀 수는 없을까?
메시지는 분명히 전달되고 있는가?
질문을 던지는 순간, 문장은 선명해지고,
감정의 결이 살아나며 글의 중심이 선명해진다.
퇴고는 '덜어내는'데서 힘을 얻는다.
필요 없는 말을 빼고,
꼭 전하고 싶은 말만 남기면 글이 훨씬 좋아진다.
원석을 다듬은 다이아몬드처럼.
나는 글을 마무리 즈음이면
오줌이 마려운 강아지처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고 싶어진다.
이때가 진짜 시작이라는 걸 알면서도,
매번 참 잘 안된다.
글공부 선생 말했다.
"책 한 권 출간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퇴고하는 동안 사고방식이 바뀌고,
표현력이 바뀌며,
나를 객관화하는 훈련이 된다."
퇴고의 과정의 중요성을 힘주어 말한다.
결국 글을 고치는 일이
삶을 고치는 일이라는 말이었다.
은유 작가는 다듬고 또 다듬은 글이라도
"웬만하면 다시 보라"라고 미란다.
그것도 모자라 자기가 쓴 글의 한계를 발견하지 못할 때,
믿을만한 글쟁이에게 도움을 받는다고 했다.
그나마 나는 운이 좋다.
내 블로그가 발행되는 메시지가 뜨면,
가끔 거실에 앉은 아내가 매의 눈으로
잘 못된 글을 지적질(?) 해 준다.
매번 해 주면 좋으련만.
가뭄에 콩 나듯 가끔 도와준다.
대놓고 부탁하면 또 안 해준다.
37년을 함께 살아도,
아내는 여전히 어렵다. 참, 알 듯 모를 사람이다.
좋은 글은 처음 쓰는 순간에 완성되지 않는다.
다시 보고, 고치고, 덜어낼 때 비로소 빛은 발한다.
쓰는 때보다 고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들이는 사람이 좋은 글을 짓는다.
고치고 또 고쳐도 완벽은 없다.
하지만 ‘더 나아질 수 있다’는 믿음만은 있다.
헤밍웨이는 《노인과 바다》를 400번 고쳤다고 한다.
'이만하면 됐다는 말이 나올 때, 진짜 고쳐야 할 때다.
'웬만하면' 한 번 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