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거주의 편익, 명동에서의 한 달

은퇴자의 거주지 정하기 2.

by 오늘의 바다 보다

“명동에 산다는 건, 생각보다 더 좋은 일이었다.”


은퇴 생활의 소중한 월세수익원인 나의 명동 오피스텔. 잔금을 치르고, 새로운 세입자를 받기 전에 한 달만 여유를 두고 내가 살아보기로 했다.


명동역과 충무로 사이에 위치한 오피스텔, 여기서는 동서남북 어디로 걸어가도 다 여행지이다. 매일 마음이 닿는 곳으로 걸어 다니며 서울 나들이를 즐겼다. 하루는 중부시장에 가서 젓갈과 건어물을 사다가 냉장고에 넣어두고 한 달 내내 아껴 먹었다. 또 다른 날은 필동 문화예술거리와 남산골 공원으로 가서 아기자기한 서울 길과 공원을 마음껏 즐긴다. 싱그러운 녹음이 우거진 공원에 노랑노랑한 옷을 맞춰 입은 아이들이 김밥을 싸들고 소풍 와 있었다. 옹기종기 모여 깔깔거리며 도시락을 까먹는 아이들. 평일 낮에만 볼 수 있는 아깝고 고운 풍경이다.


내가 그리는 삶은 거창한 것이 아님을 다시금 깨달았다. 하루에 한 번 아기자기한 골목을 찾아 산책을 즐기고, 하루에 한컷이라도 아름다운 풍경을 마음에 담는 일. 그리고 이 서울 한가운데 명동은 이런 아름다운 하루를 그리기에 너무나 좋은 곳이었다. 거기서는 명동성당도 코앞이라 자주 다녀왔다. 100년도 훌쩍 넘은 오래된 빨간 벽돌의 건물이 아직도 정갈하고 건재한 곳. 종교는 없지만 성당이라는 공간이 주는 분위기를 좋아한다. 경건하게 기도하는 사람들을 보면 나도 모르게 두 손을 마주 잡고 조심스럽게 다니게 된다. 저마다의 바람을 담아 태우는 색색의 초를 보며 소중한 것을 위해 기도하는 마음에 대해서도 생각해 본다.


서울에서 근 십 년을 살았지만 자세히 찾아볼수록 그동안 알지 못했던 명소와 볼거리가 계속 나왔다. 무엇보다 다 공짜 - 세상에 가장 좋은 것은 다 공짜라는 말은 참말이었다. 덕수궁이나 경복궁처럼 수려한 궁궐도 몇천 원 이면 하루 종일 보다 올 수 있는 곳. 각종 미술관이나 박물관은 얼마나 많은지 얼마 안 되는 돈으로도 매일 문화생활이 가능하다. 돈 없이 갈 수 있는 장소들을 지도에 표시해 놓고 아끼는 사탕을 꺼내 먹듯이 하나하나 즐겼다. 비싼 뮤지컬이나 공연은 티켓팅도 어려워 웃돈을 더 주고 거래한다던데, 내가 찾아낸 장소들에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아 숨겨진 보물을 찾은 사람처럼 뿌듯한 마음으로 감상했다.


보통 은퇴를 하면 주거비가 저렴한 지방으로 이사를 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렇게 살아보니 서울에서의 한적하고 자그마한 은퇴생활도 가능해 보인다. 사실 서울은 물가가 비씨기로 유명하지만 또 싸기도 하다. 서울이 비싸다는 사람은 불빛이 화려하게 흐르는 번화한 거리만 보는 것일까. 중심지에서 조금만 비껴가면 서울의 골목마다 오래된 빨간 벽돌주택이 즐비하고, 서민들의 매일의 삶이 흐른다. 오래된 가게에서 가게만큼 오래된 주인이 동네 주민들에게 몇천 원짜리 밥상을 제공하는 곳. 그뿐인가, 전국에서 사람도 물건도 죄다 모이는 곳이니, 청량리 경동시장의 장바구니 물가는 전국에서 손꼽히게 저렴하다. 지하철과 같은 편리하고 저렴한 교통수단도 도시에서 거주하는 편익 중 하나이다.


여유시간 없이 회사와 집만 바삐 오가던 때에는 보지 못했던 대도시의 효용이 회사를 그만둔 뒤에 더 분명히 보였다. 그런데 이렇게 돈을 아끼는 방법만 찾아다니는 것이 나의 삶의 반경을 좁히는 일일까? 사실 더 좋고 인기 있는 것들만 고개를 들고 바라보던 때에는 비싸다는 생각이 피할 도리 없이 함께 떠올라 문화생활을 적극적으로 하지 못했다. 세상은 예쁘고 귀한 것들을 대가 없이 내어주고 문턱을 낮추었는데, 내 마음속의 문턱만 스스로 높여왔던 것이다. 돈을 쓰지 않겠다는 나만의 제약이 오히려 더 많은 작품들을 감상하게 했다. 얼마 전에는 도봉구 창동에 새로 개장한 서울시립사진미술관에 다녀왔다. 운이 좋게 도슨트의 전시 해설도 함께 들을 수 있었다. 사진이 평면을 넘어 회화나 조소로도 확장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사진의 세계에 빠져들어 4시간이나 머물렀던 날, 이 세계로의 입장료도 ‘0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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