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을 지나 제주도를 반으로 가로지르는 버스를 타고 하품을 한다. 이른 아침부터 비행기를 타러 가느라 복작거린 몸이 나른하고 묵직한 피곤함을 안고 있다. 제주의 중산간 지역을 지나며 시야가 온통 초록으로 가득 찬다. 겨울이지만 남쪽 섬의 바람은 상쾌하고 햇살은 따사롭다. 차창밖으로 슥슥 스쳐 지나가는 나무들을 멍하니 보며 자연스럽게 상념에 빠진다. 이 리듬에 맞추어 머릿속의 생각도 무겁지 않게 슥슥 스쳐 지나가며 수납된다. 그랬지. 어떤 생각은 마음속 어질러진 물건을 하나씩 들어다가 맞는 서랍을 찾아 넣어주는 것만 같다. 옛 연인에 대한 생각도 잠깐 했다. 근 7년을 사귀는 동안 같이 여행이란 걸 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닫는다. 이렇게 오랜 기간 틈틈이 꺼내볼 만한 인연이었는지 생각해 본다. 그렇게 오래된 잔념이 생각지 못한 날 툭 하고 정돈되었다.
앞으로도 이런 정리하는 생각을 불러오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큰 에너지가 소모되지 않는 이런 생각하기를 쉬이 어질러지는 내 인생에 들이고 싶다. 우연히 얻은 이 경험의 조건들을 잊기 전에 헤아려본다. 바람과 햇살이 사방에서 내리쬐는 오픈된 공간이면 좋겠다. 파란 나무들이 눈앞에서 교차하며 지나가면 좋으니 이왕이면 달리는 차 안이 좋겠다. 이완된 몸으로 가볍게 생각할 마음가짐이면 완성이다. 제주까지는 필요 없다. 말없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생각을 살짝만 잡았다 이내 놓기를 반복한다. 정리하는 생각이 아니라 헤집어 놓는 생각이 되지 않도록 너무 깊어지지 않게 조심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