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드디어 긴 머리를 잘랐다. 자주 하지 않는 파마끼가 끝에 아직 남은 것이 못내 아까워 맘에 들지 않으면서도 꾸역꾸역 길러오던 머리였다. 집 근처의 작은 미용실에 전화를 걸어 두 시에 머리를 자르러 가겠다 예약을 했다. 그리고 남은 시간 동안 헬스장에서 간단히 운동을 하고 공들여 머리를 감았다.
두시 십분 전에 미리 미용실에 도착했더니, 작디작은 가게 안에 손님이 두 명이나 있었다. 마치 내가 올지 예상을 못했다는 듯 당황한 표정의 사장님. 앞의 손님의 파마가 좀 늦게 끝날 것 같다고 양해를 구하셨다. 예약은 의미가 없는 것인가 하고 불쾌한 마음이 먼저 고개를 들었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이해 못 할 일도 아니었다. 손님 하나가 아쉬운 동네 미용실에서 오는 손님을 막기는 어려울 것이다. 특히나 가격이 저렴한 곳이니 손님이 많을 수 있다고 생각하며 조용히 소파에 앉아 기다렸다. 전과 같지 않은 이 이해력은 나이를 먹어서일까, 아니면 구멍가게지만 장사라는 것을 해봐서일까. 뭐든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일에 스트레스를 덜 받아 좋은 일이다.
5평이 조금 넘어 보이는 작은 미용실 안의 두 개의 미용의자사이를 사장님이 잰걸음으로 누비고 있었다. 사장님만 바라보는 세 쌍의 눈. 그 손님들에게 기다리게 해서 죄송하다는 인상과 열심히 예쁘게 해 드리겠다는 인상을 끊기지 않고 주고 계시는 것 같았다. 부담스럽게 응시하는 눈을 줄이고자 고개를 숙이고 핸드폰에 몰두하기로 했다.
잠시 후 미용실의 문이 열리는 종소리가 들리고 할머니 한 분이 들어오신다. 손님이 한 명 더 온다면 이제는 정말 감당이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을 하는 찰나 사장님의 입에서 엄마라는 단어가 나왔다. 그 어머니의 가방에서 플라스틱 반찬통 두어 개가 나오고, 구석에 있던 빈 통이 다시 들어갔다. 분주히 일하는 딸에게 방해될까 아무 말 없이 미용실을 나가는 어머니. 생각해 보니 두시 반이 넘는 시간인데 점심 식사를 할 짬이 안나 셨겠다 싶다. 내 머리까지 자르면 세시가 훌쩍 넘어버릴 텐데 언제 저 도시락 뚜껑을 열 수 있을까.
그렇다고 갑자기 머리를 자르러 가서 미용실의 사장님을 관찰하게 된 나의 시선에 연민과 같은 감정이 섞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불황에 자신의 기술로 가게를 꽉 채우는 사십 대 후반의 사장님과 딸의 밥을 말없이 챙기는 나이 지긋한 어머니의 협력관계가 꽤나 멋있게 느껴졌다. 나는 이 세상을 성실한 자세로 뚜벅뚜벅 나아가고 있는가. 슬슬 내가 잘하는 자기반성의 시간으로 넘어가는 와중에 사장님이 나를 불렀다. 파마를 만족스럽게 말고 나간 손님이 일어나자마자 따뜻함이 가시지 않은 미용 의자에 앉았다. 가운을 두르고 거울을 보자마자 좀 전의 건설적인 상념이 한순간에 날아갔다. 푸석한 얼굴에 드리운 저 투턱은 뭐야.
외모에 신경을 꽤나 쓰지 않는 사람이라 내 얼굴을 이리 오래 응시한 적이 없었다. 자세히 보니 세월이 꽤나 붙은 얼굴. 피부는 그나마 좋은 편이라 생각했는데 칙칙한 톤에 거뭇한 잡티도 앉았다. 사장님이 기다란 머리를 댕강 자르니 그나마 남아있던 여성스러운 모습도 단번에 달아난다. 아앗 최양락 씨? 알까기로 전성기를 누리던 시절의 최양락 님이 거울 속에 조신히 앉아있는 게 아닌가. 여자들이 단발머리로 자르고 싶을 때마다 그 시절의 최양락 단발사진을 보면 포기한다고 유명해진 머리. 하도 유명해지니 최양락 씨가 방송에 나와 미인이 아닌 지탓을 해야지 왜 내 탓을 하냐며 억울해하신 것도 생각난다. 죄송해요 양락아저씨. 근데 지금 제 모습이 그 사진과 똑 닮은 것을 어떻게 해요.
하지만 골목의 숨은 강자 미용실 사장님의 솜씨는 역시나 남달랐다. 별말없이 재빠르게 머리를 다듬어 나간다. 앞머리를 자르고, 옆머리를 다듬으니 좀 봐줄 만한 수준으로 올라왔다. 파마나 드라이도 없이 생머리를 이 정도로 만드신 건 고수가 맞다. 13000원을 현금으로 드리고 가뿐한 마음으로 미용실을 나섰다. 아후 이리 가벼운 것을 뭐 한다고 꾸역꾸역 머리를 길렀을까. 머리 하나 잘랐는데, 활력이 붙고 세상이 좀 가벼워 보인다. 이참에 나이를 하나 둘 먹음에 따라 무거워지는 몸과는 반대로 좀 가벼워지고자 한다. 내 안의 강력한 무언가가 그것을 바라고 또 힘주어 이끌어내고 있으니 이것은 부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다. 이것이 자연이다. 나의 새로운 바이브이다. 속으로 되뇌며 가슴을 펴고 나가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