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기에는 바닥이 없는 구멍이 난듯한 허기짐 때문에 눈을 뜨곤 했다. 어머니는 식사 준비가 끝나기 전 내가 눈뜨지 않기를 바라셨다. 직장을 타지에서 하면서 자취를 시작했고, 나의 아침은 라면으로 바뀌었다. 튼튼한 위장은 아침, 저녁으로 라면을 끓여먹어도 문제없었다. 그렇게 3년을 보내고 결혼을 하게 된 것이었다.
남편은 처음 만난 이래 단 한순간도 나보다 몸무게가 더 나간 적이 없다. 서로 속아서 결혼했다. 정장의 눈속임 때문이다. 남편은 어깨가 있는 편이라 제법 듬직해 보였고, 나는 바지 정장을 입어서 상대적으로 날씬해 보였다.
결혼하고 신혼집에서 일어난 첫날부터 라면은 좀 그렇지, 하면서 아침 일찍 일어나 밥을 하고 감자를 썰어서 볶았다. 감자 한 개 채 써는 데 시간이 얼마나 오래 걸렸던지. 계란 프라이도 했다.
남편의 첫마디는
"미안한데 못 먹겠어요. 당신만 먹고 가요."
아침잠도 많고, 요리도 못하는 내가 이런 짓을 왜 했지? 물어보니 이른 아침에는 식욕이 없다고 했다.
확답을 받았다. 다음에 나에게 "아침밥도 안 해주고" 식의 원망은 절대 하지 말라고.
점심은 둘 다 직장에서 먹으니 문제가 없었다. 퇴근을 할 시간이 되자 걱정이 되었다. 밥은 아침에 한 것이 남아 있을 테고, 반찬은 어른들이 주신 김치, 계란 프라이. 오케이. 내가 아무거나 잘 먹고 같은 음식을 여러 날 먹어도 괜찮은 편이라 별생각 없었다.
전화가 왔다. 남편은 집 앞 시장에서 만나서 들어가자고 했고 떡볶이를 보자 눈을 반짝였다. 떡볶이와 순대를 한 접시씩 먹고는 배가 부르다며 저녁은 되었다고 했다. 내가 안되었다. 분식은 간식이다. 집에 들어가서 나만 라면을 끓여 먹었다. 우리는 서로 신기해했다. 이후 저녁은 떡볶이, 라면, 치킨 중 하나가 대부분이었다.
영약학적 관점에서 신경이 쓰여 어머니에게 전화했고, 나는 전화로 된장찌개, 김치찌개 끓이는 법을 배웠다. 반찬은 항상 어른들께서 싸주신 것과 김, 계란 프라이가 전부였다. 아주 가끔 정성을 들이면 감자볶음을 했다.
결혼하고 저녁마다 떡볶이를 사 먹으면서 알게 된 것, 남편은 요리에 관심이 많았다. 분식점 아주머니와 어묵 찍어 먹는 간장에 대해 토의가 가능했다.
"간장이 짜지 않은데 맛있네요. 물을 섞나요?"
"아유, 물 섞으면 맛이 없고, 야채 육수나 어묵 국물을 넣으면 돼요."
난 태어나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신기한 대화였다.
남편은 요리를 잘했다. 집에서 양배추를 넉넉히 넣고 떡볶이를 뚝딱 만들었다. 회 사면서 매운탕 거리를 싸 달라고 해서 집에서 매운탕을 끓였다. 내가 전생에 무슨 복을 지었던가! 먹는 것을 무척 좋아하는 나는 마냥 행복했지만 배울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시댁에서 "얘가 살림에 관심이 없고 공부만 하다 직장 다니고 바로 결혼해서 아무것도 못합니다."라는 어머니의 말씀을 겸양의 표현으로 아셨다가 진실임을 아신 것은 첫 추석 때였다. 충격을 많이 받으신 것 같았다. 시댁 지역 특성이 여자들이 살림을 정말 잘하고 남편을 정성으로 위한다. 그러니 며늘애가 당연히 전은 부칠 줄 알겠지, 생각하셨나 보았다.
명절 음식을 준비하며 좀 쉬운 것을 시키시느라 부추 씻는 것을 맡기셨는데 한 가닥, 한 가닥 고르면서 씻는 것을 보시고 당신 앞으로 가져가셨다. 시금치, 콩나물, 뭘 시켜봐도 손질에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자 전 부치는 것을 시키기로 결정하셨다. 그동안 어머님과 시누들은 점점 심란한 표정이 되었다.
난 전을 부쳐본 적이 없었다. 해주신 반죽을 프라이팬에 한 국자 떠서 폈다가 자글거리는 소리가 나길래 뒤집으면 되나 하고 뒤집개를 넣어 들었다. 반죽의 가운데만 뒤집개에 남아 있고 나머지는 팬에 그대로 있었다. 잠시 고민하다 군데군데 뒤집어 서로 맞붙여보려 하니 점점 죽이 되어 가고 있었다.
'전도 못 부치는 거였어?'
경악의 표정을 뒤로하고 그나마 할 줄 아는 설거지를 맡았다.
어머님께선 이후 나에게 늘 반복학습을 실시하셨는데 교사인 나보다 나으셨다. 정말 현명하신 분이다. 화를 내거나 잔소리를 하시지 않고 매번 찬찬히 말씀하셨다.
"오징어 껍질을 벗길 땐 이렇게 굵은소금을 써야 쉽게 된다. 초록색 야채 삶을 때는 소금을 넣어야 된다."
살림에 관심이 없다 보니 한 번 들어서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하도 들으니 가정 시간에 배운 것 같은 중요한 것들이 점점 내 것이 되었다. 그래도 여전히 명절 음식 만들기를 하면 나는 보조를 맡았다.
아들의 식성(가리는 것 없으나 양이 적음)과 며느리(가리는 것 있으나 양이 많음)의 요리 실력을 아시고도 어머님의 인사는
"아침은 먹었니?"
이었고 나의 대답은
"아침에는 못 먹겠대서 저만 먹었어요."
였다. 서로 스트레스받을 일에 에너지를 쓰고 싶지 않았다. 시댁과 친정이 우리와 다른 도시에 있어 우리 방식대로 사는 데 문제가 없었다.
<부엌살림의 문제 - 설거지는 최대한 미루기>
결혼한 후 친정 부모님 영향으로 많은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다. 너무 깨끗하게 사셨던 분들이라 크면서 본 것은 있어서 "치워야 한다"는 생각에 시달렸다. 약간의 강박이 있어서 요리(내 기준에 야채 씻기가 들어가면 요리임)를 하려면 싱크대가 깨끗해야 했다. 하지만 요리에 관심 없는 사람이 설거지에 관심 있을 리가 없다. 자취 시절부터 설거지 감은 싱크대에 쌓아두었다. 라면은 요리가 아니라 물만 받으면 되니 냄비가 쌓여갔다. 냄비 3개 정도가 쌓여 쓸 것이 없으면 할 수 없이 설거지를 했다.요리는 항상 할 수 없었다.
결혼 후에도 큰 변화가 없었다. 운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남편은 집안일이 쌓여있는 것에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릇은 찬장에 들어갈 일이 잘 없었고, 건조대와 싱크대를 오갔다. 우리는 가끔 선심 쓰듯 3일에 한 번 정도 설거지를 하며 서로에게 생색을 내었다. 저녁 먹고 설거지 감을 싱크대에 넣어놓고는 둘이 TV 앞에 앉아 서로 잘 모르는 남녀가 3개월 만에 결혼해서 이렇게 잘 맞다니 운이 참 좋다며 낄낄거렸다.
그렇게 살아도 다행히 식중독에 걸리지 않았다.
<집들이는 패스>
남편과 나, 둘 다 직장도 있지만 집들이를 하라는 성화에는 비켜갔다. "다음에요."를 시전 하다가 점점 잊혀 결국 안 했다. 집에 큰 상도 없었고, 요리를 못하니 나는 엄두도 못 냈다. 고등학교 근무를 하던 때라 툭하면 퇴근도 늦었기에 핑계도 좋았다. 처음 맞는 여름 방학에는 일정 연수(만 3년 이상 된 교사에게 나오는 180시간 자격 연수)가 있어 집들이가 불가능했다.
친정어머니는 나를 워낙 잘 아시니 친정 쪽은 집안 행사가 있을 때를 이용해서 후식만 제공하는 걸로 넘길 수 있었다. 시댁은 중국집 같은 데서 시켜먹었는지, 친정어머니 힘을 좀 빌렸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하여간 내가 집에서 열심히 요리해서 준비한 기억은 없다. 집들이를 꼭 해야 한다는 생각이 없는 남녀가 만나니 참 편했다. 집들이를 하지 않은 것에는 지금도 후회가 없다.
난 업무를 빨리 못하는 편이지만 열심히 하려 했고 퇴근을 늦게 하고도 일을 집으로 가져와서 하는 스타일이었다. 남편은 업무를 빨리 잘해서 집에 올 때쯤에는 지쳐서 TV를 보고 쉬어야 했다. 나의 살림 실력이 늘지 않는 이유 중 하나였다.
그 기간에 바퀴벌레는 본 적이 거의 없었다. 아마 앞 전에 사시던 분이 깔끔하셨거나, 새 가구 등에서 안 좋은 물질이 나와서 그랬을 것 같다. 역시 운이 몹시 좋았다.
밥을 반드시 집에서 만들어 먹는 것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두 명이 사는 집에서 요리해 먹다 보면 재료비, 음식물 쓰레기, 다 못 먹고 버리는 식재료가 생각보다 많다. 퇴근하고 집에 오면 파김치일 때가 많은데 시간을 들여 요리를 하고, 설거지까지 하는 것은 큰 스트레스이다. 부부의 상황에 맞게 외식, 배달, 직장 급식 등을 활용하는 것이 더 좋을 때도 있다. 선택지가 많은 한국에 산다는 것은 엄청난 축복이다.
제목 수정 안내: 모든 성인 여자는 전을 잘 부치나요? -> 모든 성인은 전을 잘 부치나요?
적어주신 답글을 읽다가 뒷통수를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제가 제 나이에 맞는 수준의 성인지를 하고 살았네요. 여자든, 남자든 상관없이 평소 부엌일에 조금만 관심이 있거나 집안에서의 요리를 도와드렸다면, 그 성인은 전을 부칠 줄 알 것입니다. 답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