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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살다 Apr 27. 2020

취미요? 호박씨 까기입니다.

취미를 시작하세요. 치유됩니다.

정신이 건강하려면 취미나 사회활동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미국에 와서 노인들을 보며 깨닫고 있다. 이웃 M 할머니는 천 짜기, 자수, 요리를 취미로 하고 계신다. 여행과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하셔서 공항에서 여행자들을 돕는 봉사활동을 시작하려 하셨는데 코로나 19로 못하고 계신다. 지금은 이 사태가 끝나면 봉사활동에 도움될 수 있게 수화를 배우신다. 영어 수업을 해주시는 다른 할머니 한 분은 요리 수업을 하신 적이 있으실 정도로 요리를 좋아하신다. 코로나 19 사태를 대하는 이웃들을 응원하기 위해 개인 집에서 부른 노래 동영상을 모아 합창으로 만든 영상을 보내주셨다. 30여 명의 합창 장면 가운데서 활기차고 자신 있게 노래하시는 모습이 멋졌다.


한국에 있을 때는 주변에 취미를 가진 분이 거의 없었다.


정말?


곰곰이 생각해보니 하나 둘 떠올랐다. 털실 코바늘 작품을 취미로 하시며 퇴직 후 공방을 하시겠다던 분, 유화를 취미로 시작했다가 지금은 유명 작가가 되신 분, 기타를 수준급으로 치시는 분, 첼로를 취미로 배우시는 분, 요가를 배우다가 자격증까지 따신 분, 바이올린을 배우시는 분, 골프를 배우시는 분, 배드민턴을 치시는 분, 농사를 지으시는 분, 천연 화장품을 만드시는 분, 밴드를 하시는 분 등.


이럴 수가. 한국에 있을 때도 취미를 가진 분들이 주변에 많았다. 그런데 글을 쓰기 전에는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왜 일까?


전에는 부정했었지만 지금은 말할 수 있다. 질투를 했었다. 왜 저 사람은 저렇게나 능력이 뛰어날까? 어떻게 저런 멋진 시간을 누릴 수 있을까? 가끔 미디어나 책에서 취미를 전문적인 수준으로 발전시킨 사람들을 보고 나면 왠지 스스로 너무 나태하고 삶의 중요한 부분을 실패한 느낌이 들었다.


진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애써 눈을 돌렸다. 뭐든 즐길 수 있으려면 노력의 시간을 거쳐야 한다. 누구도 초보 시절을 지나칠 수 없다. 좋은 변명거리가 있었다. 직장일을 마치고 나면 파김치가 되고 불량 주부로서 생활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웠다는 것. 하지만 그것은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변명하지 말자.


나는 무엇이든 용두사미였다. 십자수, 종이접기, 피아노, 종교활동, 코딩, 아두이노, 3D 프린터, 발명, 유화, 포토샵 배우기, 동영상 편집, 블로그에 글쓰기, 일상 만화 그려보기, 바이올린. 모두 꼼지락 거리며 시작은 해보았다. 초보의 '초'자도 입에 올리지 못할 수준에서 멈추었다.


아무것도 열심히 노력할 생각은 없었다. 그럼에도 취미가 너무 좋아서 실력이 일취월장하고, 결국 수입이 되는 놀라운 일은 없을까 하는 생각, 아니 망상을 했다. 적어도 일 년에 한 번, 연초에는 반드시 했다. 20대에는 다이어리 첫 장에 늘 "30이 되기 전까지 정말 하고 싶은 일을 찾자"라고 썼다. 30대가 되면서 "40이 되기 전까지"로 바뀌었고, 40이 되는 해에 깨달았다. 정말 하고 싶은 일이라는 것을 평생 찾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정말 하고 싶은 일이라는 것이 거창할 필요가 없는데 거창한 것을 찾고 있었다는 것을.


전에는 책 읽는 것과 과학을 좋아한다 자신 있게 말했는데 갈수록 흥미가 없어진다. 과학 관련 책조차도 보지 않는 나에게 실망했다. 하고 싶은 게 뭐냐고 누가 물으면 늘 유화를 하고 싶다 했는데 시간이 남아돌아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부끄럽게도 그 모두가 남에게 보여주는 것이 목적이었나 보다. 이상적 취미라고나 할까.


현실 취미를 찾을 때가 왔다. 휴직 중인 지금 못 찾는다면 영영 힘들 것 같다. 정말 좋아하는 활동이 무엇일까?


글을 계속 써보는 것은 어떨까? 지금 해보지 않는다면 다시는 기회가 오지 않을 것이다. 휴직할 때 아니면 언제 이렇게 시간이 될까. 인터넷에서 재밌는 글을 몇 가지 발견했고, 브런치 플랫폼을 발견했다. 다른 플랫폼이 뭐가 있는지도 몰랐다. 무작정 가입을 했다.


요즘 무척  즐겁다. 내 속에 하소연들이 이렇게 많이 쌓여있는지 그 전에는 몰랐다. 나의 억울했던, 즐거웠던 감정들을 쏟아내기에 바빴다. 조회수나 공감, 구독자 수가 신경 쓰이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중요하지는 않았다. 직접 상담을 받을 때보다 더 큰 치유를 받고 있다. 몇 년 전에 읽은 "내 이야기 어떻게 쓸까?"라는 책이 떠올랐다. '한 뼘 자전 소설 쓰기'라는 활동을 통해 자신을 성찰하고 치유하는 방법과 그들의 작품을 안내한 책이었다. 당시 리뷰를 쓰면서 내 이야기를 풀어쓰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느꼈는데 그 사이 나는 성장했나 보다.


생리로 괴로웠던 감정을 반분이나 풀어냈다. 결혼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것들도 다 토해내었다. 우울감의 원인이 되었던 사건도 글로 적고 보니 성찰이 되고 '나의 부족한 점'을 알게 되었다. 풀어내고 싶은 이야기가 더 남아있다. 새로운 경험들에 대해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며 그 경험들도 적고 있다. 알고 있다. 출간할 수 있는 내용의 글은 아니라는 것을. 하지만 즐거우면 된 것 아닌가? 글쓰기가 취미 중 하나로 확정되었다.


며칠 전 이웃 M 할머니께서 주신 스킬 자수를 해보니 시간 가는 줄을 모르겠다. 점점 공간이 색으로 채워지는 것이 사랑스럽다. 이게 나의 새로운 취미생활이 될까? 잘하게 되면 작품 팔게 되는 거 아냐? 고작 손바닥만 한 것 한 번 해보고 또 김칫국을 마시고 있다. 용두사미면 어떠랴. 일단 조금 더 해봐야 계속하게 될지, 말지 알 수 있는 것이다. 기왕 재료 주신 김에 디자인도 해보자. 지금이 아니면 언제 해보겠는가.


이쯤 적고 보니 궁금하다. 취미의 정의는 무엇일까? 생산적이지 않고 자랑스럽지 않아도 괜찮다. 남과 자신에게 피해 안 주고 즐거우면 좋은 취미다.


그렇게 본다면 20대부터 완벽한 취미가 하나 있다. 일 년에 딱 한 번 하는 활동이다. 음력 1월 1일 혹은 2일 깜깜한 밤, 친정 식구 다 잘 때 혼자 2~3시간 TV를 보며 넋 놓고 한다. 바로 바싹 마른 호박씨 까기. 아무 생각 없이 기계적으로 앞니로 호박씨의 뾰족한 부분을 세로로 세워 살짝 물면 '톡'하고 씨의 껍질이 갈라진다. 그러면 손톱으로 사과껍질 깎듯 돌려가며 호박씨를 깐다. 바싹 마른 호박씨는 내용물에 침이 묻거나 하지 않고 깔끔하게 깔 수 있다.


혼자 거실에서 소리 죽여 TV를 보면서 채반에 있던 호박 1개 분량의 호박씨를 모두 까서 그릇에 모으고 나면 아쉬운 기분이 들면서도 그렇게나 뿌듯하다. 호박씨를 까는 동안은 나 자신을 잊을 정도로 아무 생각이 없어진다. 가끔은 엄지손톱 밑이 들려 아플 정도로 몰입해서 호박씨를 깐다. 약속한 것도 아닌데 설 쇠러 친정에 가면 베란다에 바싹 마른 호박씨가 있다. 그걸 너무 좋아하니 매번 준비해두시는 것 같다. 강박증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열심히 까는 스스로를 상상하면 황당하기까지 하지만 즐겁다. 그 어떤 고민도 생각나지 않는 명상시간에 가깝다.


살면서 상처입지 않는 사람은 없다. 취미는 상처 치유 능력이 있다. 의식하지 못하던 상처마저 치유해준다. 취미를 시작하고 싶다면 꼭 기억하자. 용두사미일지언정, 일단 해봐야 나에게 맞는지 알 수 있다. 나를 치유하는 것은 거창하지 않아도 된다. 호박씨 까기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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