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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어리 Oct 28. 2022

필리핀 단상

9년 전, 다큐멘터리 제작 지원을 위한 출장기


"현장답사" "사전조사" 등 '업무'의 옷을 입은 필리핀 출장은 실은 여행에 가까웠다. 작가와 피디 각 한 명씩 소수정예로 움직였던 지난 탄자니아 출장과 달리, 이번에는 방송사에서 총 네 명이 동행한 데다가 필리핀 사무소 직원들의 철저한 지원 덕에 굳이 내가 메워야만 할 빈틈이 많지 않았던 것이다. 굳이 담당해야 할 역할이라면 사무소와 방송사 사이의 소통만 중계하는 정도랄까...   


그 덕에 비록 빡빡한 일정이었지만 마음만큼은 필리핀 일주 여행을 하는 것 같은 여유로움도 느낄 수 있었던 것 같다. 제작진들을 모두 한국으로 먼저 돌려보내고 사무소 직원 둘셋과 마닐라 인근을 돌아보았다. 전시물품 시장조사도 하고, 한국음식을 선호하는 어르신들 탓에 충분히 먹어보지 못했던 현지식도 실컷 맛보고...


마닐라 시내에 있는 호텔은 출장비로 가져간 하루 숙박비 상한액인 80불이 모자랄 정도로 비싼 편이다. 다행히 소장님이 미리 염려해주신 덕에 코이카 유숙소에서 이틀을 머무르며 봉사단원이 된 듯한 기분도 느껴본다. 마지막 날 한 인턴 직원의 선물로 들렀던 마사지샵. 아주머니 마사지사의 손에서 힘이 자꾸 빠진다. 두피를 마사지하던 손이 한동안 움직이지 않는다. 그저 모른 척 인사를 건네며 그녀의 삶의 무게, 심신의 피로를 존중한다.


필리핀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 "Thanks, Ma-am" 친구가 되어보려 말을 건넨 내게 깍듯이 고개를 숙이는 스무 살 운전기사 '드란'. 그에게 나는 자신의 하루 일당을 쥐고 있는 '고객'일뿐이다.


커스터마이징(Customizing)의 천국. 지프니, 트라이시클, 패디캡... 필리핀의 민간 대중교통수단들 중 어떤 것도 같은 외관을 띠지 않는다. 페트병으로 만든 작은 화분들, 페인트통에 담긴 화초들, 짚더미로 만든 크리스마스트리까지..


거리에서 흘러나오는 노랫소리. 방음장치 없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노래방 기계들. 매년 수차례 펼쳐지는 마을 축제에 돈을 쓰기 위해 지방정부는 훼손된 아스팔트 보수 공사도 하지 않는다고 한다.


필리핀 학생들의 '코리안 드림', 그 환상을 깨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는 직업훈련원의 봉사단원. 6년간 일하던 한국에서 불법체류자로 적발되어 추방당한 아들을 둘이나 두었다는 한 초등학교의 할머니 선생님. 한국에 연수생으로 초청되어 호화로운 문화 경험을 한 후 소위 '친한파'가 되었다는, 그토록 환대하던 한 기관장.


마닐라 시티. 한 블록 차이로 구정물과 폐휴지로 뒤덮인 판자촌과 최고급 호텔, 은빛 커튼월의 마천루가 공존하는 곳. "한국보다 잘 살았다"는 필리핀의 7-80년대를 아는 어르신의 주저 없는 탄식. 그 안타까움에 아랑곳하지 않는 그곳 사람들의 신실함.


드란의 백미러에 걸린 묵주 십자가. 출발 전, 한 번도 빠짐없이 묵주와 운전대를 쓰다듬으며 짧게 기도하는 그의 뒷모습이 여전히 생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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