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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스 Nov 12. 2020

산티아고 경찰서 투어?

분실신고 접수 중

원래 일정은 오전에 와이너리 투어를 다녀온 후 여유 있게 쉬다가 공항으로 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종직이가 내 휴대폰을 잃어버린 관계로 일찍이 경찰서에 가서 도난 신고를 접수하고 와야 했다.  

   

늦어도 12시 전에는 볼일을 마쳐야지 1시쯤 출발하는 와이너리 투어에 참가할 수 있기에 전날에 일찍 출발하자고 신신당부를 해뒀다. 일찍 씻고 아침까지 먹고 나왔는데 정작 사건 당사자인 종직이는 아직 침대에 누워 자고 있길래 멱살을 잡아 흔들어 깨웠다. 미적거리다 오전 10시가 넘어서 숙소를 나섰다.         

 

자기 실수 때문에(본인은 불가항력을 주장하지만,) 하루 일정이 날아가게 생겼는데도 태연히 늦장을 부리는 걸 보고 있으니 ‘저게 대체 미안한 마음이 있는 놈인가?’ 부아가 치밀었다.     


나는 일부러 삐진 티를 내며 종직이의 등 뒤로 멀찌감치 떨어져 걸어갔고, 종직이는 내 눈치를 살피다 몇 번을 잘못된 길로 빠지며 헤매다 간신히 경찰서에 도착했다. 




도난 신고서를 제출하고 나니 벌써 오후 한 시가 넘었다. 와이너리 투어는 이미 물 건너간 지 오래였다. 애써 태연한 척하며 “나온 김에 시내 구경이나 하자.”라고 했다.   


산티아고의 여러 명소를 돌아다녔지만 그런 마음가짐으로 재미가 있을 리 없었고, 둘 사이에 어색한 기류는 쉽게 풀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종직이가 새 휴대폰을 개통하겠다고 대리점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나는 혼자 아이스크림을 사서 아르마스 광장 벤치로 갔다.             


화창한 날씨와 달콤한 아이스크림, 그리고 시원한 그늘 아래 살갗을 일렁이는 바람이 뾰로통한 내 마음을 조금 누그러트렸다. 시원한 맥주나 함께 하면서 어색함을 풀어야겠다 마음먹고 다시 휴대폰 가게로 갔더니 종직이가 보이지 않았다. 주변 대리점을 모두 뒤져봐도 찾을 수가 없었고 연락할 방법이 없었기에, 쉽게 포기하고 먼저 숙소로 돌아갔다.     


종직이는 한참 뒤 해가 질 때쯤 되어서야 숙소에 나타났는데, 내게 또 욕을 먹을까 걱정이 됐는지 나를 찾기 위해 계속 거리를 헤매다 늦었다고 했다. 그 말을 들으니 그동안 너무 잔소리를 해댄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공항으로 출발하기까지 두 시간밖에 안 남았는데 맥주를 여섯 캔이나 사 오다니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얼른 마트에 가서 작은 와인 한 병으로 바꾸고 돼지고기를 조금 샀다. 무슨 부위인지도 모르는 고기를 두툼히 썰어 잔뜩 후추를 치고 그저 센 불에 구웠는데 꽤나 훌륭했다. 아까의 서먹함이 무색하게 칠레 산 와인을 가득 담은 술잔이 소란스럽게 부딪혔다.    

 

하지만 잠깐의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공항으로 가는 버스는 10시 30분이 막차였다. 지하철역에서 공항버스로 환승해야 했는데, 시간 계산을 잘못하여 겨우 십 분을 남겨놓고 지하철역에 도착했다. 버스 터미널을 찾지 못해 사람들에게 위치를 물어보며 허겁지겁 뛰어다니고 있는데, 휘익 고개를 돌려보니 따라오던 종직이가 멀리서 입에 담배를 물고 있었다.     


순간 짜증이 치밀어 욕설을 내뱉었다. 

    

"야 임마 지금 담배 피고 있을 시간이 있냐?“  

   

겨우 버스에 탑승한 뒤 잔소리를 퍼붓기 위해 종직이의 얼굴을 쳐다봤는데, 어찌나 피곤했던지 아랫입술 가운데가 홍해 마냥 쩌억 갈라져 있었다. 측은한 마음이 들어 그냥 고개를 돌린 채 쪽잠을 청했다. 공항에 도착해서 종직이와 함께 바닥에 드러누워 처음으로 노숙을 해봤다.  

  

할만한데? 체질인가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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