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at you eat is what you are 라는 유명한 말이 있다. 그런데 이 말 역시도 유명해질만한 가치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 what you buy is what you are. 역시나 나의 애정하는 이동진 평론가께서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다. 다소 길지도 모르지만 그의 말을 그대로 옮겨놔 놓고 싶다. 너무 공감가는 부분이 많은 말이었기에.
"돈을 쓴다는 건 정말 영혼을 건 결정이잖아요. 돈 너무나 중요하잖아요. 지금 사실은 칼국수를 먹을지 육개장을 먹을지 결정하는 것도 굉장히 중요하잖아요. 중요한 일이고 삶에서 너무 중요하고요. 어떻게 보면 뭐 I'm what I buy 정도 되겠죠. '내가 사는 게 바로 나'라고 말할 수도 있고요. 넓게 보면 돈보다 더 중요한 건 시간이기 때문에 내가 시간을 어디다 쓰느냐가 결국 나라고 생각하거든요. 예를 들면 내가 A라는 사람을 너무 사랑한다고 말을 하는데 그 사랑하는 사람의 시간을 덜 쓴다면 그만큼 사랑하는 게 아니겠죠. 물론 이제 생각하는 걸 포함하는 거지만. 그런 측면에서 사실은 돈을 옷 사는데 쓰고 차 사는데 쓰는데, 사실 나는 원래 책을 좋아하는데 말이야 하면 그 사람은 책 안 좋아하는 거거든요. 책 좋아하는 사람은 책 사는데 돈을 써요. 결국은 돈을 어디다 쓰느냐, 시간을 어디다 쓰느냐가 그 사람일텐데. 저는 돈을 이런 미친 짓에 쓰고 있으니까 저는 그런 사람인 거죠. 제가 생각해도 좀 미친 거 같고요. 어떻하겠어요, 고칠 수 없다는 걸 깨닫게 됐으니까 즐기고 있습니다."
(흡... 역시 나의 아이돌이야, 이동진 씨!!) 이동진 평론가의 말을 듣다보니 간송 전형필 선생이 떠오른다. 물려 받은 집안의 재산을 탕진하다시피 문화재를 사들이는데 썼던 사람. 저게 무슨 값어치가 있냐고 물음표를 던진 사람들은 미처 보지 못했던 간송선생만의 혜안 덕분에 지금 한국에 <훈민정음 해례본>이 있을 수 있었다. 그는 대체 어떤 것에 미쳤길래 거기까지 이를 수 있었을까. 내 이십 대 시절에 블로그 소개말로 남겨봤던 불광불급(不狂不及)을, 그는 이렇게 이루어내었다.
내가 대학교를 다니면서 건졌던 꽤 값어치 있는 이론은 매슬로우의 욕구 5단계설이다. 아주 유명한 가설이라서 사회학, 심리학, 교육학, 경영학 그 어디에도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다재다능한 가설이다.
경영학도였던 나는 그의 가설을 알게된 것이 마케팅 과목 수업 덕분이었다. 인간이라는 것이 왜 니즈(Needs)를 가지느냐에 대한 근거로 매슬로우가 등장하였다. 사람에게 니즈가 생기는 것은 자아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과정이라는 관점이다. 지금도 그 설명은 나에게 매우 타당하다 생각한다. 마케팅을 흔히들 제품 컨셉 잘 잡고 효과적으로 홍보하는 게 다라고 생각하는데, 내가 바라보는 마케팅은 인간 자체가 무엇인지를 탐구하고 그것을 아이템화하는 일련의 과정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종교야말로 인류 역사에서 꾸준히 소비되어온 최고의 상품이라고 생각한다. 인류는 꽤 오랜시간동안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서 그 종교적 가치를 소비했고, 해왔고, 또한 할 것이다. 적어도 세계 메이저 종교의 경우에는 그 종교가 추구하는 핵심가치가 인간이 실현하고자 하는 핵심가치와 파장이 맞아떨어졌기에 이토록 오랫동안 다수의 사람들에게 영감을 줄 수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때문에 나는 신이 없다고 생각하는 무신론자임에도 불구하고 불교라는 종교를 가지고 있다. (나무 아미타불~!)
독서도 마찬가지다. 스탈린 식의 독서는 아니될 말이지만, 독서는 텍스트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나를 찾게 된다. 어느 구절이 유독 나에게 와닿고 기억에 남는다면 그것은 그 텍스트가 가진 함의가 당신이 가진 자아의 파장과 일치했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이 유독 편하고 다가가고 싶다면 그 사람으로부터 느껴지는 어떤 점이 내 자아의 파장과 공명하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선택한 소품과, 인테리어, 인간관계 모두 어떤 점에서는 내 자아상이 가지고 있는 어떤 한 부분을 형이하학적인 수단으로 현신화(現身化, 비슷한 순 우리말로 '나투다')시킨 것이라고 나는 바라본다. 이러한 주장은 내가 애정하는 학자, 리사 펠드먼 바랫의 최근 저서 <이토록 뜻밖의 뇌과학>에도 수록된 내용과 유사하지 싶다. (이 책, 아직 읽지 않았는데 대단히 관심이 간다!)
해서 그런 생각도 해 본다. 인간이 종교를 신을 상정하고 따르는 것은 어쩌면 내 안에 신성(神性)이 있기 때문은 아닐까? 불교는 신을 인정하는 편이지 않아서 '신성'이라는 말 대신에 불성(佛性)이 있다 한 것 아닐까? 나는 과학적인 측면에서 신이란 증명이 가능한 존재가 아니라는 점 때문에 무신론자의 삶을 살지만, 인간이 가지고 있는 신성과 불성에 대한 지향이 곧 인간이 신이라는 방증이라면... 어쩌면 나는 신을 믿는 사람이 될 가능성이 충분히 있지 싶다. 아, 그래서 동학(東學)의 창시자인 최제우가 인내천(人乃天, 사람이 곧 하늘이다)라고 했던 건가? 인간은 이미 신일런지도 모른다.
사이비종교 때문에 피해자가 수두룩 빽빽이 나오는 대한민국이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불교, 유교가 대단한 충돌없이 어우러진 데에는 어쩌면 이런 이유가 있으런지도 모르겠다. 그게 하느님이 되었든 부처님이 되었든 우리 사회와 부모님을 향한 충과 효과 되었든 이미 우리가 지향하고 있는 지향점 그 끝이 결국에는 인간으로 되돌아옴을 알기 때문에 메소드만 다를 뿐이지 결국 다 같다는 걸 무의식이 이미 눈치채고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닐까? 그래서 하느님은 탕자인 아들이 돌아와도 사랑으로 감싸안으시었고, 부처님은 자비의 마음으로 중생을 구제한 것이지 않을까?
그렇다면 정토회 행자로서 모자이크 붓다를 외치는 내가 이미 내 안에 깃들어있는 신성을 깨닫고 자비의 마음으로 산다면, '모자이크 붓다'라는 외침이 단순한 주문이 아니라 내 미래에 실현될 어떤 예언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