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애정하는 서양철학자는 여럿이 있지만, 상위 랭크를 자치하는 자 중에 한 명이 제레미 벤담(Jeremy Bentham)이다. 그가 주장한 공리주의(Utilitarianism,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은 아주 단순하지만 또한 굉장히 효과적으로 내 삶과 이 사회에 스며들어 있다. 공리주의가 이 사회를 돌아가게 만드는 원리로서 부족한 면이 없는 건 아닌데, 상당히 많은 사안들이 공리주의적인 관점으로 처리되고 있고 또한 사회가 그럭저럭 잘 굴러가고 있다.
같은 원리로 공리주의를 저해하는 사건들은 대체적으로 좋지 않은 선택일 때가 많다. 2025년 대한민국 계엄령 선포사건을 보라. 순식간에 대한민국 여론이 분열하고, 트럼프가 집권한 가운데 기민한 외교를 펼쳐야 하는 가운데 권력공백이 생기고 말았다. (이걸 계엄을 막은 민주당 탓을 하려는 건 아니겠지?) 들어보니까 건너건너 영업하시는 자영업자들은 안그래도 불경기 때문에 힘든데 계엄 때문에 장사가 너무 안되서 힘들어 죽겠다고. 계엄 관련하여 어처구니 없는 일이 터질 때마다 환율이 오르면서 자산가치는 살살 녹고. 전세계에 나라망신(계엄령 선포)과 나라자랑(2시간 만에 계엄령 해제)을 생중계 했네그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일을 보라. 러우 전쟁 덕분에 현대전의 양상이 완전히 바뀌었다며 새로운 전쟁전략을 개발했다는 시각도 있기는 한데. 본인이 그 전쟁에 동원된 청년이고 아버지라면 그 말이 먼저 나왔을까? 게다가 공업지역을 완전히 잃은 우크라이나는 이제 곡식을 팔아야 연명할 수 있는 나라가 되고 말았다. 그나마 우크라이나가 흑토지대인 걸 감사히 여겨야 할 지경.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고, 많은 사람이 비통에 잠겼다. 불가에서 말하는 팔고(八苦, 여덟가지 고통) 중에 애별리고(愛別離苦,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아픔)라는 말이 있다. 오죽이나 했으면 제행이 무상하다고 말하는 불가에서조차 사랑하는 이를 잃는 아픔을 말했겠는가. 우크라이나인들은 얼마나 오랜 기간동안 슬픔에 잠길까.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에 진심이었던 벤담 아저씨는 죽어서도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에 기여하고자 자신의 시신을 대학교에 기부하였다. 지금도 University college of London에 가면, Auto-icon이라고 명명지어진 그의 시체가 방부처리 되어 전시되어 있다. 지독한 공리주의자가 아닐 수 없다. 죽어서도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외치다니.
"내가 죽어도 나의 철학을 기억해 달라. 사후에도 나 존재 스스로가 이 사회에 유용하게 쓰여지게 해 달라. Utilize me. I'll be the auto-icon of Utilitarianism!!!"
이렇게 낭만이 쩌는 공리주의도 100% 완벽하지는 못하다. 그 점은 트롤리 문제(Trolley problem)를 통해 구체화될 수 있다. 트롤리 문제는 매우 유명한 사고실험이지만 혹시나 생소하실 몇 몇의 독자분을 위해 트롤리 문제를 설명드리자면 다음과 같다. 독자께서는 철길 옆에 서 있다. 독자 옆에는 트롤리가 진행하는 경로를 바꿀 수 있는 레버가 있다. 독자께서는 레버를 그냥 두어 트롤리가 가던 방향대로 가게 할 수도 있고, 레버를 당겨 옆의 선로로 진행방향을 바꿀 수도 있다.
아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자세히 보니까 철길에 사람이 묶여있네? 트롤리가 가던 방향의 철길에는 다섯 명의 사람이 묶여서 철길에 누워있네? 그리고 옆으로 난 철길에는 한 사람이 묶여서 누워있네? 살려달라고 하네? 그럼 독자께서는 어떻게 하실 참인지? 레버를 냅둬? 당겨??? (고민하는 새 다섯 명은 사망...)
독자님을 포함한 많은 이들이 레버를 당겨 다섯명을 구하겠다는 결정을 한다. 다섯 명을 죽이느니 한 명을 죽이겠다는 셈이다. 아주 잔인한 공리주의의 일면이다.
그런데 여기서 끝나면 재미가 없지. 기출변형 들어간다. 만일 옆으로 난 철길에 묶인 사람이 살아돌아온 루즈벨트 프랭클린 대통령이라면? 세종대왕님이 전생해서 누워계신 거라면? 다섯 명 중에 히틀러랑 스탈린이랑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포함되어 있다면 당신의 선택은??? 누워있는 사람 사이에 질적 차이가 조금이라도 일어나면 공리주의적 선택은 혼란에 휩싸여 버린다.
이게 공리주의의 맹점이라며, 개개인을 필요 이상으로 균등하게 바라보는 공리주의는 전제부터 틀려먹었다며 비판하는 이들도 있다. 허 참~내, 세상에 진리가 뭐 공리주의 하나뿐인가? 세상은 넓고 진리는 많다. 그리고 기출변형 트롤리문제가 시사하는 바는 아주 단순하다 : 대안 간에 질적 차이가 나는 상황에서 공리주의를 적용하는 것이 적합하지 못하다. 그렇다면 더 나은 대안을 찾으면 되는 거지. 뭐가 문제야?
아주아주 다행이게도 세상은 넓고 의외로 천재는 많다. 45억년 지구역사에 비하면 쨉도 안되지만 인간도 나름대로 고유의 역사데이터를 쌓아왔다. 여러 천재들이 세대를 거듭하여 통찰이 담긴 철학을 발견하고 사회시스템을 구축 해 왔다. 그래서 벤담의 공리주의마저 이 사회를 조화롭게 굴러가게 만드는 사회제도의 재료로 활용하는 수준이 된 것이다. 이 얼마나 다행이야. 우리에게 많은 대안이 있고, 상황마다 어떤게 적합한지 경험했고, 경험을 통해 앞으로 닥칠 위기에서 지혜를 발휘할 수 있음이.
어찌되었든 일단 내 인생의 디폴트 철학은 공리주의이다. 간편하고 유용하다. 마치 내가 법과 도덕을 대함과 같다. 그 관념이 이 세상을 모두 아우르지 못할지라도 그 효용가치 때문에 나는 법과 도덕을 매우 중요시여긴다.
그래서 법과 도덕에 대한 절대주의자들이 나같은 사람을 보면 마음이 적잖이 불편할 수도 있을테지만 그래도 괜찮다. 상대주의와 절대주의가 반목해서 얻을 게 뭐지? 상대주의든 절대주의든 지금 눈 앞에 있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면 니편 내편 가리지 말고 협력하는게 중요할텐데. 레버를 당길까 말까 고민하느니 트롤리를 막아버릴 괴력의 소유자가 나타난다면 그게 베스트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