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장의 타임라인> 12월 17일
일하기 싫은 연말. 기지개 한번 크게 켜고나서 매년 나누어 주는 탁상용 캘린더에 시선이 떨어졌습니다. 캘린더의 내년 주제는 시인들의 멋들어진 시어를 이용한 캘리그래피인 것 같습니다. 단어 하나하나를 곱씹어 보게 됩니다. 최근 분노조절 장애 현상이 생기면서 하루하루가 피곤합니다. 시인의 마음처럼 절제하는 미덕이 제게는 필요한 것 같습니다.
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른거린다.
열없이 붙어 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길들은 양 언 날개를 파닥거린다.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새까만 밤이 밀려나가고 밀려와 부딪치고,
물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박힌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고운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
아아, 너는 산새처럼 날아갔구나!
<유리창 1, 정지용>
어제저녁은 딸아이의 뮤지컬 공연에 초대를 받아 저녁에 서둘러 마감을 하고 회사를 나섰습니다. 학습도 바쁜데 언제 준비를 했는지 기특하지 말입니다. 유치원 시절에 장윤정의 '어머나'라는 곡에 맞추어 율동 공연하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세월은 또 십수 년이 흘렀네요. 그냥 눈 한번 감았다가 떴을 뿐인데 말이지요. 휴대폰으로 동영상을 찍다가 불과 3년 전에 똑같은 고 1 딸내미의 영상을 담았을 어느 아빠가 생각났습니다. 공부 좀 못해도 건강하게 자라고 있는 우리 아이가 한없이 고맙기만 합니다. 이렇게 이쁜 딸의 공연을 세월호 그 부모님도 같은 느낌으로 보셨을 것이고 그리고 그 아이와 잔인한 이별을 했을 것이고...
이보미 학생은 공부도 잘 했고 노래도 잘 했습니다. 그해 겨울 선배 졸업식에서 학교 대표로 부르기 위해 연습했던 곡을 아빠는 동영상으로 담았고 가수 김장훈 씨는 자신의 목소리와 영상 편집을 통해 온 국민의 마음속에 다시 담았습니다.
정지용 시인의 '유리창'을 통해 폐병으로 자식을 잃은 부모의 아픈 마음을 표현했습니다. 유리창에는 차고 슬픈 아이의 환상이 어른 거리고 있겠지요. 유리는 안과 밖을 연결시키기도 하지만 단절시키기도 합니다. 창밖에 새가 되어 눈물 속의 빛나는 별이 된 아이에게 가까이 갈 수 없었습니다. 시인 아이의 고운 폐혈관이 찢어졌지만 세월호 아이들의 고운 폐혈관은 짜디짠 바닷물에 채워지고 그 부모들의 피눈물이 되어 다시 솟아오릅니다. 지난주 박근혜가 표현한 피눈물이라는 단어는 그녀가 함부로 써서는 안 되는 단어입니다.
청문회에 나온 수많은 증인들 그리고 그들의 입에서 내뱉어지는 수많은 거짓들을 들으며 우리는 또 우리 마음에 곪아있는 상처에 또 소금을 뿌려지는 아픔을 느끼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산새가 되었지만 별이 되진 못했습니다. 어른들은 죄를 짓고 거짓말을 하고... 그리고 인간이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들이 그들의 죄를 뉘우치고 사람으로 돌아오지 않는 한 우리는 또 길고 긴 겨울밤에 입김을 흐리우고 열없이 유리창 너머에서 컴컴한 별빛 없는 하늘을 바라만 봐야 하겠지요. 지치지 않았으면 합니다. 조금이라도 세월호 아이들에게 그리고 더러운 세상에 이미 태어나 버린 우리 아이들에게 조금이라도 미안한 마음이 있다면 광화문에서 누군가가 켜고 있을 촛불을 바라만 보지는 않았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