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ten by 울지, 클래미
일요일 저녁 아내와 함께 성수동을 찾았다.
설렁설렁 동네를 걷다 근처 책방을 발견하고 나는 '카네기 인간관계론' 아내는 '프리다 칼로 그림책'을 구입했다. 보통 일요일에는 월요병의 여파를 줄이기 위해 마음을 가다듬고 불필요한 약속이나 외출을 꺼리지만 이번 주말에는 제대로 즐기지 못했다는 이유로 길을 나섰다.
결혼을 해서 가능했던 데이트였다. 연애를 하던 시절에는 토요일에 겨우 만나고 일요일에는 되도록이면 가족과 보내거나 (위에 말했던) 마음을 정돈하는 시간을 갖곤 했는데, 결혼을 하고 나니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언제든지 부담 없는 데이트를 할 수 있다는 게 큰 장점이다.
일요일 저녁도 여유롭게 보낼 수 있다는 사실을 새롭게 느끼고, 저녁 10시쯤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대화의 화두를 던졌다.
너는 인생의 꿈이 뭐야?
나로 말하자면 워낙 기분파와 논리파를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이기에 오늘의 데이트에 큰 영감을 받고 '여유로움을 즐길 수 있는 삶'을 살고 있다고 말했다. 예전에는 가슴이 뛰는 일을 찾아 바쁘게 지내는 삶을 동경했지만, 요즘에는 예쁜 가정을 꾸리고 친구들과 가끔씩 바비큐 파티를 하며 지내는 게 꿈이 되었다. 열정을 잃어버린 건 아니지만 무게중심이 커리어에서 삶 자체로 옮겨졌다는 뜻이다.
참고로 아내의 경우 공대 출신의 순수 과학과 수학을 좋아하지만 (암산을 좋아하고 돈 계산은 그 자리에서 바로하는 타입) 논리와 팩트로 가득 찬 논픽션보다 스토리가 있는 소설을 더 즐겨 읽고 한때 드라마 PD를 꿈꿨던 사람으로서 감수성 또한 풍부한 사람이다.
그녀는 내가 한 말에 대부분 동의하면서도 한 술 더 떠 그녀의 꿈을 말했다.
조깅 같은 삶
너무 느긋해서 심심하거나
너무 빨라 힘들지도 않은
너무나 와 닿는 표현이라 마음에 쏙 들어왔다.
항상 새롭고 도전적인 삶을 추구하던 나와 달리 그녀는 안정적이고 슬로우 라이프의 성향을 가진 사람이다. 신혼여행지를 고를 때도 나는 LA나 샌프란시스코에서 트렌드와 도전 정신을 탐구하고 싶었고 그녀는 하와이의 빅아일랜드에서 고래와 화산지대를 구경하고 싶다고 말했다. 여러 논의 끝에 자연과 도시를 적절히 즐길 수 있는 샌디에고로 가기로 정했다. (결국 코로나로 인해 신혼여행은 무기한 연기되었지만 말이다) 아무튼 매우 다른 성향의 두 사람으로 출발했지만 점차 간격이 좁아지고 비슷해져 가는 듯했다.
이어서 나는 '조깅 같은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물어봤다.
평소에 기초 체력을 길러야지
예전에 함께 참가했던 10KM 춘천 마라톤을 예로 들었다. 워낙 차로만 다니다 보니 10KM의 거리가 짧다고 생각했던 나는 준비 하나 없이 당일날 처음으로 뛰었고 아내는 세 달 전부터 매일 저녁에 석촌호수를 두 바퀴 넘게 뛰면서 체력을 단련했다. 당일날 비도 많이 왔고 어려 모로 힘든 상황이었지만 아내는 본인의 페이스를 지키면서 10KM를 여유롭게 마쳤고 나는 심장이 찢어지도록 뛰다 멈추다만 반복하다가 닭갈비를 먹으러 가자는 말에 겨우 따라 들어왔다. (이후 하프 마라톤을 도전하자는 말을 계속 회피하고 있다)
마라톤을 뛰다 보니 힘든 구간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중간에 내리막길을 만나 신나게 전속력으로 뛰었다가 오르막길에서 힘이 다 빠져 10분 이상 먼산만 바라봤던 적도 있었다. 아마 나 같은 초보자는 처음에 빠르게 치고 나가다가 중간에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게 다반사 일 것이다. 갑자기 쉬운 구간을 마주하더라도 방심하지 않고 꾸준히 페이스를 지키는 게 완주의 비결인 것 같았다.
갑자기 찔끔한다고 달라지지 않아
이 모든 게 나의 삶이 되어야지
변화가 생기는 것 같더라고
평소부터 기초 체력을 탄탄히 길렀던 그녀는 (매일 야식을 비타민처럼 챙겨 먹던 나와는 너무 다르게) 조금이라도 몸을 가볍게 만들려고 식단을 조절하기도 했다. 초반에는 급한 마음에 다이어트 약도 찾아보고 아이유 식단도 따라 해 봤지만 극단적 변화는 작심삼일을 넘길 수 없었다고 했다. 결국 롱런을 유지하게 해 준 것은 아침 10분 스트레칭과 2리터의 물을 마시는 간단한 습관이었다. 당장 효과를 가지고 오지는 않지만 삶 자체의 습관을 바꾸는 것이 변화를 만드는 유일한 방법이었다고 말했다.
스포츠카에서 조깅 같은 삶을 꿈꾸다.
나는 늘 남들보다 빠르고 멋진 스포츠카 같은 삶을 동경했다. 젊은 2030대 CEO를 동경하며 글로벌 기업이나 고속 성장하는 스타트업에서 종사하는 친구들을 부러워했기에 대학생 때는 동아리도 운영해보고 여러 분야에서 인턴 경험을 쌓으며 청춘에 아낌없이 투자했다.
지금 한창 고속도로를 달리는 나의 모습이 자랑스럽지만 가끔은 벌써부터 버겁다고 느낄 때도 있다. 멋진 선배를 본받고 빠르게 따라잡으려고 노력했지만 어느 바닥이든 최소 10년은 굴러야 한다는 사실에 눈 앞이 캄캄해진다. 대신, 예전에 꽤나 무시했던 '화려하지 않지만 큰 기복 없이 본인의 페이스를 묵묵히 지키며 사는 삶'도 대단하고 행복해 보일 때가 있더라.
결국 만족하고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각자만의 꿈을 좇으면서 멋진 경험도 즐기고 사람들과 좋은 관계도 만들어 가야 할 텐데 이 모든 것을 적당히 누리려면 특정 분야에만 몰두하는 것이 아닌 나름대로의 벨런스 조절이 필요해 보인다. 그리고, 이 것은 어느 순간에 반짝 이뤄내는 게 아닌 오랜 시간 동안 쌓이는 나만의 라이프 스타일과 습관에 비롯된다. 안 그래도 본업과 관련 없는 분야도 조금씩 관심갖고 공부하고 싶었는데 그때 구입하고 책장에 고이 모셔둔 '카네기 인간관계론'부터 다시 펼쳐 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