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ten by 클래미
유명 아이돌 기획사에서 일하고 있다.
나날이 엄청난 성과를 기록하며 국뽕에 한껏 취해 자랑을 늘어놓으며 살고 있는데, 특히 요즘 회사 주식까지 치솟다보니 금전적으로나 커리어적으로 걱정 없이 잘 지내고 있다.
그러다 오랜만에 컴백한 에픽하이의 10집 앨범 수록곡 'Lesson Zero'를 듣고 깊은 고민에 빠졌다. 피아노 전주부터 밀려오는 감동의 파도, 가슴을 내려 찍는 가사의 깊이를 느끼며 "예술이란 이런 거지"라는 깨달음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끔 했다.
인간은 참 간사하다.
나는 에픽하이를 2003년 데뷔 앨범 때부터 입덕 해서 모든 앨범의 instrumental 곡까지 빠짐없이 들었고 타블로의 소설집까지 여러 권 사서 지인께 선물로 줄 정도로 오래된 찐 팬이라고 자부할 수 있다. 에픽하이가 울림에 있었을 때부터 Map the Soul를 차리고 YG에서 활동하다가 중간에 HIGHGRND를 또다시 차렸다가 지금은 독립할 때까지 모든 행적을 따라다녔다. 그리고 타블로 같은 사람 옆에 있으면 얼마나 많이 배우고 즐거울지 자주 상상을 하곤 했지만, 실행에 옮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지적 호기심을 마음껏 채우면서 자아실현과 같은 초월적인 만족감을 얻지 않을까 싶었지만, 금전적으로나 커리어적으로 너무 리스키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20대 초중반 당시 패기 넘쳤고 금전적으로도 크게 부족함 없었는데 불구하고 결국 용기가 없어서 그 기회를 흘려보냈다.
사실 지금도 늦지 않았지만 그냥 한 줌의 좋은 추억과 나의 최애 플레이리스트에 고이 보관하고 이대로 만족하려 한다.
인생을 극단적으로 간소화하면 비즈니스맨과 예술가의 삶으로 나눠진다고 생각한다.
비즈니스맨 : 자본을 위해 사는 삶 (예. 회사원, 공무원, 아이돌 뮤지션 등)
예술가 : 의미를 위해 사는 삶 (예. 성직자, 사회 운동가, 인디 뮤지션 등)
(1) 인생은 원점으로부터 비즈니스맨 vs. 예술가의 삶을 향해 나아간다.
비즈니스맨이라면 엄청난 자본가나 사업가만 상상하겠지만, 결국 많든 적든 돈을 위해 사는 사람들을 모두 포함한다. 물론 직업 특성상 펀드 매니저처럼 비즈니스의 최전선에서 돈 버는 것 자체가 목표인 사람도 있지만, 스타트업이나 NGO처럼 돈이 최우선의 가치는 아니지만 필요 수단인 직업들도 포함하고자 한다. 결국 돈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사람들이다.
예술가라면 의미, 사상, 가치, 신념을 위해 사는 사람들을 모두 포함한다. 참된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며 돈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들이다. (가끔 이러한 의미를 위해 큰 자본을 얻을 기회를 과감히 포기하거나 대의를 위해 자신의 생을 마감시키기도 한다.)
(2) 중간에 번복은 가능하되, 가로지르는 것은 불가하고 반드시 원점을 찍고 되돌아가야 한다.
아이돌과 인디 뮤지션을 예시로 쉽게 설명해보겠다. BTS가 아무리 자체 프로듀싱이 가능한 그룹이라도 아이돌이라는 그림자에서 벗어나긴 힘들다. 그럼에도 더 이상 아이돌이 아닌 예술가로서 인정을 받고 싶다면, 아이돌로서 얻은 업적, 인지도 등을 모두 내려놓고 새로운 삶을 살아야지 가능할 것이다. 만약 모든 것을 거두절미하고 예술가로서 인정받고 싶어 한다면 예술가 집단뿐만 아니라 기존 팬덤에서도 반발이 심할 것이다. (아이돌에서 갑자기 락으로 전향한 문희준/영웅재중, 힙합으로 전향한 은지원/라비가 음악적으로 이도 저도 아닌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 것 처럼. 대신 박재범의 경우 아이돌로서 바닥을 찍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 힙합가수로 성장하지 않았는가)
인디 뮤지션도 마찬가지다. 대중보다 음악성을 위해 노래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대형 기획사에 입단하게 된다면 인디 씬에서 아유를 보낼 것이다. 실제로 가장 메이저 한 힙합 그룹인 에픽하이 마저 인디펜던트로 활동하다가 YG에서 앨범을 내자 기존의 힙합씬에서는 지나치게 상업적인 음악 스타일로 변했다고 많은 실망감을 보였다.
흥미로운 것은 비즈니스맨과 예술가는 양 끝에 있는 지점이지만 그 사이에 무수한 grey area가 있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비즈니스맨은 예술가를 동경하고, 예술가는 비즈니스맨을 동경한다는 아이러니함 때문이다.
많은 비즈니스맨들이 금전적으로 여유로워지면 공연, 전시회, 뮤지컬 등 문화적 소비를 즐기기 시작하고 심지어 악기를 배우거나 사진을 찍는 등 예술적 취미에 아낌없이 돈과 시간을 투자한다.
예술가의 경우에도 인디 뮤지션들이 대중 매체에 자주 출연하고 메이저 뮤지션들과 콜라보를 보이며 과거처럼 인디 씬과 메이저 씬 간 경계가 많이 흐려졌다. 최근에 페노메코가 엑소 앨범에, 선우정아가 지드래곤 앨범에 프로듀서로 참여하듯이 서로 시너지가 이뤄지고 있고, 오히려 언더그라운드만 소비하던 지식층 마니아들이 힙찔이 오타쿠로 놀림을 당하는 시대다.
주변 지인들에게 비즈니스맨과 예술가 중 어떤 삶을 택할 건지 여러 번 물어봤는데 생각보다 특별히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도 꽤 있었다. 아무래도 내가 엔터테인먼트 업계에 종사하기도 하고 대학생 때부터 앨범 작곡, 영상 촬영 등 창작 활동을 해봤던 사람이기 때문에 더 크게 와 닿았던 것 같다. 그럼에도 예술을 Art에 국한시키지 않고 돈과 결부되지 않은 가치(예. 사회적 가치, 환경 보호, 기술 혁신, 인권 운동 등)로 넓게 생각해본다면 누구나 생각해볼 수 있는 질문이라고 생각된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아직 원점으로부터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두 사이에서의 괴리감이 크게 느껴지지 않지만, 10년 후 이 길을 열심히 달리다 보면 상대로부터 꽤 다른 삶을 살고 있음을 실감할 것 같다. 그때 가서 내가 선택한 삶이 후회스럽지 않도록 처음부터 방향을 잘 설정해야겠다는 생각에 에픽하이의 신보를 무한 플레이하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서로의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에 정답은 없지만, 여러 고심 끝에 나만의 해답을 찾아냈다.
봉준호의 '기생충'을 보고 큰 충격에 휩싸였던 기억이 있다. 연출, 시나리오, 주제 등 모든 방면에서 신선했을 뿐만 아니라 엔터테이닝 했다. 이전에 만들었던 살인의 추억, 괴물, 설국열차, 옥자 모두 대중적인 주제보다는 사회적 이슈를 다룬다는 점에서 대단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상업 영화를 지독하게 싫어하는 아카데미, 칸 등 해외 유수 시상식을 모두 휩쓴 것을 보고 그가 단순 영화감독이 아닌 진정한 예술가로 거듭났다고 생각했다.
이후 봉준호가 사전에 꽤 정교한 전략을 가지고 영화를 차례대로 준비했다는 사실을 들었다. '옥자'를 찍으려면 할리우드의 거대 자본이 필요한데 이를 위해 '괴물'로 CG 기술과 탄탄한 시나리오를 입증했고 '설국열차'로 외국 배우/스탭을 다룰 수 있는 연출력을 보여줬다. 이를 토대로 봉준호는 넷플릭스로부터 거액의 투자를 받고 '옥자'를 찍을 수 있었다.
심지어 당시 기존 메이저 영화관에서 넷플릭스 영화를 보이콧하는 사태가 있었는데, 봉준호는 이에 굴복하지 않고 넷플릭스 독점 배포는 계속 유지한 체 독립 영화관에 영화를 상영하면서 메이저 영화관이라는 골리앗에 대항하는 다윗의 프레임을 씌웠다. 그때 나는 그의 탁월한 비즈니스적 센스를 잊을 수 없다.
결국 봉준호는 스티븐 스필버그와 크게 다르지 않은 상업 영화 감독이지만, 모든 족적에 예술가의 호르몬을 몇 방울씩 떨어뜨려 예술가의 향을 은근히 배어나도록 설계하는 것이 그가 상업성과 예술성을 모두 잡은 비결인 것 같다. (중요한 것은 힙스터의 ‘향’이 나야지, 진짜 힙스터가 되면 안 된다!)
정규직 마케터로서 나의 삶 90%를 좋든 싫든 회사가 만든 제품이 더 잘 팔리도록 고군분투하는 비즈니스맨의 삶을 살고, 나머지 삶 10%는 내가 가슴 깊이 애정 하는 분야에서 누구보다 자유롭게 활동하는 예술가의 삶을 살려고 한다.
어차피 나는 마냥 예술가의 삶을 살기 틀렸다. 안 그래도 리스크를 질 용기도 없고 예술가적인 기질이 특출 나게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마냥 비즈니스맨으로 살아가면서 예술가의 삶을 죽을 때까지 동경하면서 살 수는 없을 텐데, 이렇게나마 나만의 딱 맞는 해답을 찾은 것 같아 어느 정도 마음의 위안이 되는 것 같다.